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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김우규 <필자-문학 평론가>
     (제3장) 성서적 진리를 의곡(歪曲)한 작품들

성서적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의 현대소설 가운데는 많은 작품이 비판적인 시정(是正)을 받아야 할 것이다. T. S. 엘리옽이 말한대로 「문학비평은 명확한 윤리적, 신학적 관점에서의 비평에 의해서 완성되어야 한다.」(Literary criticism should be completed by criticism from a definite ethical and theological standpoint.)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면 모름지기 성서적 입장에서의 비평도 가능한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그것대로 의의(意義)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 방대한 검토를 시도(試圖)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도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성서적 사실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의곡(歪曲)하므로써 성서적 비의(秘義)를 멸각(滅却)시켰거나 변조(變調)시킨 작품만을 대상으로하여 논급(論及)하려는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작품으로서는 우선 앞서 말한 송기동(宋基東)의 「回歸線」이란 소설이 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가 있었기에 여기에 다시 인용한다.

송기동씨의 「回歸線」이란 작품이 교계에서 비난을 산 일이 있다. 예수를 성적(性的) 불구자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쯤되면 갈 데 없는 독신적(瀆神的)인 작품이다. 루낭의 <예수傳>은 비교도 안될 정도다. 루낭의 시도(試圖)는 예수를 인간으로서 포착(捕捉)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대담하게 거세(去勢)시켰던 것이다. 그것이 정통적인 신학자들에게 부정적인 비판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합리주의라는 철학이 있었다. 말하자면 비판의 건덕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回歸線」에는 비판을 가(加)할만한 <철학>이 있었던가? 불행히도 송씨의 대담한 착상에서 우리는 아무런 <철학>도 찾아볼 수가 없다. 기발한 악취미의 소산일 뿐이다. 그러니 구구한 비판이 오히려 과분할 정도다. -이하 생략-
-「韓國基督敎作家論」-

그러나 이상에 인용한 말만으로는 그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잘 납득이 안 갈 것이다. 해서 간단히 그 경개(梗槪)를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이때 예수는 로마병정들이 자기를 잡으러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칼프시스」란 사나이를 매수해 두었다. 칼프시스는 예수와 용모가 매우 흡사했는데, 그는 살림이 어려운 탓으로 거기에 쾌히 응낙한 것이다. 이리하여, 칼프시스는 예수로 가장(假裝)하고 법정에 끌려가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고, 골고다로 향한다.

한편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딴 사람으로 가장하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구경한다.

예수가 아닌 칼프시스는 드디어 십자가에 달리고 얼마뒤엔 무덤에 안치된다. 그런지 사흘째 되는 날, 미명에 예수와 마리아는 그 무덤께로 찾아간다. 이때 마리아는 파숫군 두 명을 유혹하여 마을로 데리고 내려가서 술을 먹이고 한편 예수는 가사(假死)상태에 빠진 칼프시스를 돌려보내고, 하얀 옷을 갈아입은 채 무덤 속에 들어가 천사의 행세를 한다. 그 뒤엔 손에 피 칠을 하고 제자들에게 나타나군 했다. 역시 부활을 가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막달라 마리아와 공모해서 하는 일이다.

어느날 예수와 마리아는 같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둘이는 가까운 굴속으로 찾아들었다. 거기서 마리아는 예수를 육체적으로 정복하리라고 별러오던 결심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몸이 쇠잔할대로 쇠잔해진 채, 거기에 불응한다. 그러다가 얼마 뒤엔 숨을 걷운다. 그러자 마리아는 마지막 용기를 내어 예수의 옷을 벗긴다.

「아 아!?」
풀어 헤쳐진 그의 몽둥아리를 눈여겨보더니 또 한번 비명을 질렀다.
배꼽에서부터 한 뼘쯤 밑에 마땅한 형태도 갖추지 못한 채,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은 한점 살만이 꼬부라져 있을 뿐…… 그밑에 또한 맞붙어서 동그랗게 늘어져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자다!-
-성적불구자(性的不具者)!!-
어찌할 수 없는 반항이 아니겠는가? 잠시 말라붙었던 마리아의 눈에서 또 다른 슬픔들이 샘 솟는다.
-이런 병신에게 뭣을 바라고 쫓아 다녔던가?-
-내가 정말 너무도 순진했어, 그의 말과 같이……-
-그런데 왜 나를 속여가면서까지 부질없는 그따위 연극을 한단 말인가?- -중략-
-중략
-결국 나는 인생의 향락만을 알던 그 옛날의 생활로 돌아가야지…… 한 사람의 사나이론 역시 내겐 부족해…… 이것이 할 수 없는 나의 타고난 숙명인가 봐……-
-중략-
-정말 재미있는 연극이었어,…… 좀 힘들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가 언젠가 내게 이야기하듯이 직접 못 박혔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런 어려운 연극보담이야 훨씬 쉬운 연극이었어…… 나밖엔 그 누구도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거던……호호호……」

그러니까 송기동이 본 예수의 활동은 결국 <위대한 연극>이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구자적(不具者的)인 반항심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이것은 서구문학에서도 일찌기 유례(類例)를 볼 수 없었던 지극히 독신적(瀆神的)인 각색(脚色)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또한 성서적 사실을 번복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신앙의 궁극적 권위를 파괴하는 반기독교적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여기에 어떤 사상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앞서 지적했듯이 구구한 논의가 필요치 않다. 여기서 작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무릇 역사를 창조한 위대한 행동의 배후에는 왕왕(往往) 기록상의 사실과 배치(背馳)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고-.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반항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영웅적 행위는 대체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이거나 이상상태(異常狀態)를 수반(隨伴)하는 것이라고-. 물론 그러한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가정(假定)을 입증하기 위해서 예수를 끌어왔다면, 그는 자기 상상(想像)의 노예가 되는 셈이다. 그 기발한 상상력을 피력하기 위해서 이천년간의 역사를 의해서 공증(公證)된 사실을 부인할 권리가 과연 그에게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것은 용인해도 좋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록은 영원한 진리로서의 권위와 신빙성을 조금도잃지 않을 터이니까. 그러니 결론은 역시 「구구한 비판이 오히려 과분할 정도이다.」

다음으로 성서적 사실을 의곡(歪曲)한 것은 아니나 기독교를 야유한 작품의 예(例)로서 김동인(金東仁)의 「明文」이란 소설이 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일찌기 김동리(金東里)가 「自然主義의 究意」이란 김동인론(金東仁論)에서 언급한 바 있기에 그 대목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 적음으로써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전주사(田主事)는 대단한 예수교인이었습니다.」
그의 붓대가 한창 자연주의(自然主義)의 정열로서 익어가던 1925년 1월 그는 「開鬪」지(誌)에 발표한 「明文」이란 소설의 첫 센텐스를 이렇게 떼었다.
그는 (전주사) 머리를 깎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와 어미니에게까지 예수교를 전하여 보려 하였습니다.
「네나 천당인가엘 가라」
어머니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천당? 사시 꽃이 피어? 참 식물원에는 겨울에도 꽃이 피더라, 천당까지 안가도…… 혼백이 죽지 않고 천당엘? 흥 이야긴 좋다. 네 내 말을 잘 들어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혼백이 죽느니라. 몸집은 그냥 남아있고……. 몸집이 죽는게 아니라 혼백이 죽어. 혼백이 천당엘 가? 바보의 소리다 바보의 소리야. 하하하」
신(神)이라고만 하면 언제나 「하하하」로 시종(始終)하는 전주사의 아버지는 다른데서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하하하, 너희 하느님도 질투는 꽤 세다. 네 내말을 명심해서 들어라. 이 전판서는 다른 죄악보다 질투라는 것을 가장 미워한다. 너도 아다싶이 아직껏 첩을 안두는 것만 보아도 여편네 사람의 질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겠지. 나는 질투 심한 너희 하느님을 섬길 수가 없다. 하하하하 너희 하느님도 여편넨가 보구나-」
이렇게 차라리 야비하리만큼 용감하게 신(神)을 조롱하던 전주사의 아버지 전성철씨(田聖徹氏)가 임종에 이르렀다.
그는 힐끗 아들을 본 뒤에
「우리 예수꾼-」
하고는 성가신 듯이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기도해라. 아무 쓸데는 없지만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 그러나 내게는 하느님보다 네가 귀엽다. 자 애비의 손 찬 손을 잡어라」
여기엔 신(神)이고 영혼이고 다시 더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김동인씨의 고백이었다. 그에게 있어서의 「자연주의 세례」는 곧 「신(神)고의 절연(絶緣)」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곧 신(神)과 절연(絶緣)된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며 신과 절연과 인간이란 곧 동물로서의 인간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이에 그의 철두철미 「기계적 물질적 동물적」 인간관에서 볼 때 신은 야유와 한갖 조롱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상은 김동인의 무신론주의를 그가 자연주의에 의한 「근대정신(과학적 실증적)의 희생자」라는 관점에서 해부한 글이다. 이것은 특히 김동인의 문학을 규정하는데 비교적 정확한 초점을 발견한 해석이라고 본다. 그러나 김동인의 자연주의는 서구문학의 그것과 반듯이 동질(同質)의 것이 아니었듯이 그의 무신론적 성격도 서구적인 자연주의의 그것과는 스스로 차질(蹉跌)된다는 것만은 참고삼아 부언하고 싶다. 김동인의 그것은 서구 근대정신의 영향이라기 보다 오히려 동양적인 니힐리즘의 반영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상으로서 성서적 사실을 부당하게 의곡(歪曲)한 작품과 기독교적 신앙을 냉소하고 야유한 작품의 대표적인 예(例)를 거론(擧論)한 셈이다.

 
   [머리말] 성서의 우리말 번역과 그 문화사적 공헌

   [본론] 한국 현대소설에 반영된 성서의 영향

    (제1장) 성서의 기사(記事)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제2장) 성서의 정신을 주제(主題)로 한 작품들

    A.「사랑」이 주제가 된 작품들

    B.「회개」가 주제로 된 작품들

    C. 반바리새주의 정신이 주제로 된 작품들

    D. 기타

   (제3장) 성서적 진리를 의곡(歪曲)한 작품들

   [맺는말] 성서와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