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활동과 성서의 반포
기독교의 교세(敎勢)가 세계적으로 가장 광범한 지역을 석권(席捲)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경이적(驚異的)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경이적인 현상>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기독교 그 자체의 종교적 감화력이 다른 종교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심대(深大)하다는 것과 또한 그것이 인류적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가지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은 그 선교방법이 독창적이었다는 점이다. 의료(醫療), 교육사업을 비롯한 일반 사회사업과 <언어와 문자>에 의한 선교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여기서 명기(明記)해야 할 것은 <언어와 문자>에 의한 문서활동, 그 중에서도 성서의 활발한 보급이 더 중점적이었고, 또 그것이 항상 선교활동의 획기적인 성과를 가져오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성서가 선교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크리스챤의 「신앙과 복종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활동의 성과는 바로 성서의 보급에 정비례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경우가 가장 단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세계 선교역사상 가장 특기(特記)할만한 성과를 거둔 학국에서는 무엇보다도 성서의 신속하고도 다량적인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한국 기독교가 오늘의 성황을 가져오게 된 그 배후에는, 본격적인 성서반포사업이 시작된 이래 불과 반세기동안에 성서의 반포량이 무려 삼천만부 이상을 돌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로 놓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보급량의 지수(指數)는 그대로 선교활동의 성과를 명시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국보다도 한걸음 앞서 선교의 혜택을 입었던 중국이 결과적으로 오히려 한국보다도 후진 상태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아울러 참작한다면 더욱 확실시(確實視)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성서의 보급이 부진(不振)했다는 것이 그 중요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서보급의 다과(多寡)는 선교의 성과를 결정하는 중대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어학계의 권위인 이희승(李熙昇)이 일찌기 강조한 바 있다.
언어를 잘 이용하는 종교일수록 그 전파가 용이하며, 신자의 심령의 창(窓)을 더욱 간곡하게 더욱 심각하게 두드리게 된다. -중략- 그리고 예수교가 오늘의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나 그 교역자들의 각방언연구(各方言硏究)에 큰 공적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니…… 언어와 문자를 통한 예수교의 활동이 그 얼마나 한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해교(該敎)의 성황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희승 지음 「朝鮮語學論攷」에서-
이것은 기독교가 선교사업에 있어서 <문자와 언어>의 기능(技能)을 얼마나 유효(有效)하게 활용했느냐 하는 것과, 또 그러한 방법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 하는 점에 대한 증언(證言)이다.(여기서 <언어와 문자>라는 것은 주로 성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희승의 그런 관점은 또한 한국의 경우에 그래도 적중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서의 보급과 선교와의 관련성을 구명(究明)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한 걸음 나아가서 성서가 한국사람에게 어째서 그처럼 보급될 수 있었느냐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어째서 오늘의 성황을 가져왔느냐 하는 문제와도 직결(直結)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물론 다각적(多角的)인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사회적으로 봉건주의의 쇠퇴기(衰退期)에 놓여있었다는 점이라든지, 종교적으로 유교나 불교가 이미 지배적인 세력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점이라든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는 모든 객관적인 상황(狀況)과 함께 민족성 자체에 이르기까지 실로 여러 각도에서의 해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도 더 중대한 이유가 우리말 성서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우리말 성서가 평민적인 용어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감화력(感化力)을 염두(念頭)에 아니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성서적 진리는 항존적가치(恒存的價値)를 보유(保有)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별도로 하고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그 표기상(表記上)의 조건이 얼마만치 유통성(流通性)을 가졌느냐는 것만 가지고 따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즉, 우리말 성서는 표기문자(表記文字)의 조건이 유리(有利)했기 때문에 그 보급이 한층 활발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이것도 역시 중국에서의 경우와 대비하여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중국에서는그 표기문자가 어려웠기 때문에 보급의 성과가 그만치 부진(不振)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그것이 소위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문장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성서는 일반 대중 속으로 용이하게 침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성서에 의한 영향은 처음 한국문화를 새로운 국면(局面)에로 전회(轉回) 시키는데 기동적(起動的) 작용력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 구체적인 경로를 회고해 보기로 하자.
우리말 성서와 신문화(新文化)
한국의 신문화는 한국의 근대화(近代化)가 성립되기 시작한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개화(開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갑오경장과 동시에 싹트기 시작한 신문화운동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 한글에 대한 재인식(再認識)과 그로 말미암은 언문일치(言文一致)의 문장을 개척하였다는 점이다. 유길준(兪吉濬, 雅號 矩堂)을 그 선각자로 꼽는 소이(所以)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가 지은 「西遊見聞」(乙未年刊行)이 비록 선한문체(鮮漢文體)로 쓰여지기는 했으나 이것은 근세 한국 문화사에 있어서 일찌기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언문일치 문장의 효시(嚆示)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看過)해서 안될 것은 성서의 우리말 번역은 그보다도 훨씬 선행(先行)했다는 점이다. 최초로 번역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1882년(고종 19년)에 간행되었고, 그 개역과 함께 「마태복음」「마가복음」신역(新譯)이 그 다음해인 1883년에 간행되었고 이어서 1887년에는 이수정 역「마가복음」이 간행되었으며 다시 1887년에는 로스(John Ross)박사 역으로 된 「신약전서」(원명, 「예수셩교젼셔」)가 간행되어, 우리 나라에 유입(流入)되었던 것이다.(이상은 모두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번역간행된 것이지만) 그리고 한국에서는 1885년에 내한(來韓)한 초대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아펜셀러(H. G. Apenzeller)에 의해서 본격적인 번역이 시작되어 1887년에 「마가복음」의 간행을 보게 되었는바 이상과 같은 모든 성서의 우리말 번역은 전기(前記)한 구당(矩堂)의 「西遊見聞」이 간행된 을미년(乙未年 1895년)보다도 여러 해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표기문자에 있어서도 유길준이 일찍이 제시(提示)한 바 있는 선한문체 사용의 필요성을 더 철저한 형태로 구현(具現)하고 있는 것이다. 즉 「西遊見聞」보다 앞서 성서를 번역한 사람들은 이미 구당(矩堂)이 내세운 언무일치문장 사용의 이유중, 가장 중요한 조항인 「일반민중(一般民衆)에게 주도(周到)히 소개(紹介)하여, 써 민지(民智)의 계발(啓發)을 도모(圖謀)하려면, 무엇보다 그 문체(文體)가 평이(平易)하여야 함이요」라는 말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때의 우리말 성서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대중적인 구어체(口語體)라는 점에서는 구당(矩堂)의 「西遊見聞」보다도 한결 선구적인 구실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한글의 표현적 가능성과 그 효능( 能)에 대한 최초의 활용이며 또한 최초의 성과이기도 했다.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가 급속도로 성공하기에 이른 중대한 비결의 하나는 실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또 그러한 성과는 언문일치(言文一致)로서 특징지어지는 신문화의 발전에 대한 큰 공헌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제가(諸家)의 대표적인 기록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 한글 부흥기 전후에 있어서, 한글의 부흥, 정리 및 보급에 대하여 막대한 공적을 끼친 것으로, 우리가 예수교의 선교사업을 들기를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교는 원래 만인평등의 사랑의 종교이요, 항상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무식한 사람에게 무한한 동정을 가지는 종교이라, 그 조선선교의 수단으로서 당시 일부 식자계급(識者階級)에만 전용되던 비대중적(非大衆的)인 한자를 버리고, 평이하고 민중적인 한글을 채용하여, 그 성경을 번역하게 된 것은 당연의 일이라 하겠다. -중략-조선사람으로서 이 한글 보급의 기독교의 위대한 공적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가지지 아니할 이 한 이도 없을 것이다. -최현배 지음 「한글갈(正音學)」에서-
대체로 근세의 이 국문발달의 경과를 보면 거기는 서학발전(西學發展)의 중대한 영향을 잊을 수 없는데, 서학이 전래(傳來)하자 그 교리를 널리 일반대중에 보급시키기 위하여 곧 성서의 조선어번역을 시작하였다. -중량- 이로 인해 기독교의 전파가 용이하였던 것은 물론이나 또 그로 인해 일반평민대중에 신문화가 널리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국문의 발달에 지대(至大)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현대의 국문이 기독교에 힘입은 바 극히 크다고 믿어지나 과거에는 공사용문(公私用文)이 한문이 아니고는 안될 줄만 알았던 것이 이제 와서는 국문으로서 능히 만족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에는 문화가 일부 특수계급에 전용되어 한문으로도 능(能)하였지만은 이제는 그러한 일부 특수분자의 상대가 아니라 국민전체 곧 일반 대중의 상대로서 문화가 존재할 수 있고, 또 존재하였기 때문에 기실 국문이 아니고는 근대적인 문화의 정신을 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조윤제 지음 「國文學史」에서-
한국의 현대적인 발전에 대한 기독교의 이러한 조력(助力)이 한국의 현대적인 과정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구체적인 공로를 남긴 것은 국문의 장려와 서양과의 직접적인 교류운동(交流運動)이다. 국문혼용의 언문일치 운동이 근대문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일내용(一內容)이였으나 순국문의 사용은 소설과 번역된 성서를 떠나서는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종교적인 신앙의 보급을 목적으로 한 성서의 우리말 번역이 우리의 언어생활과 문자생활에 남긴 공로는 어떠한 신(神)의 구조사업보다도 결코 적게 평가되어 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연현 지음 「現代韓國文學史」(第一部)에서-
이상 인증(引證)한 글들은 모두 한국의 현대적인 언어생활과 문자생활을 가져오게 한 신문화운동에 있어서 우리말 성서가 끼친 영향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리말 성서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신문화운동의 가장 구체적인 결실(結實)의 하나인 이인직(李人稙, 雅號 菊初), 이해조(李海朝), 최찬식(崔瓚植)등으로 대표되는 신문학(新文學)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신문학이전에 간행된 우리말 성서가 그 소설문체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말 성서가 신소설(新小說)의 언문일치의 문장을 낳게 한 정신적동기(精神的動機)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이상으로서 신문화운동에 대한 우리말 성서의 공헌은 대강 고찰해온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면 특히 문학에 대한 성서의 영향은 그것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성서의 영향>이라는 것을 보다 보편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의 영향>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는다면 그 범위와 깊이는 실로 심대(深大)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우선 한국의 현대적 지성(知性)의 형성과정에 미친 사상적 영향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언어생활이나 문자생활에 미친 영향보다도 더 중대한 국면(局面)에서의 기여(寄與)이기도 한 것이다.
평논가 조연현(趙演鉉)이 그의 저서 「韓國現代文學史」(第一部)에서, 기독교가 <한국의 현대적인 발전에 중요한 협력을 가(加)해 주었다.>고 한 말도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악조건(한국근대사의 기형적(畸型的)인 특수성-필자註) 속에서도 한국의 현대적 발전에 중요한 협력을 가해준 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기독교의 한국유입(流入)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한국의 현대적인 발전에 끼친 그 대중한 영향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중략- 기독교의 그 종교적인 신앙은 드디어 일부 한국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히 점령해 들어갔으며 그 근대적인 문화성은 한국의 전통을 또한 잠식(蠶食)해 들어갔다. 기독교에 침범된 전통의 중요한 일부가 유학적(儒學的)인 것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한국 포교(布敎)는 그 종교적인 신앙과 함께 한국의 봉건성을 밀어내고 한국의 근대적인 발전을 돕는 결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前揭書 P28~P29-
위에 인용한 조연현의 관점은 적어도 한국근세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가 시인할 수밖에 없는 자명(自明)의 사실이기도하다. 한국의 봉건적인 문화양식(文化樣式)은 실제로 서양과의 교류에 의해서 지양(止揚)되었던 것이며, 서양적 영향의 기능적주체(機能的主體)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였다는 것은 사실이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기독교의 한국현대사에 끼친 이러한 영향과 그 역할은 한국현대사의 특수성을 구성해주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말 성서는 소위 신문화 내지 신문학운동의 선구적인 효시(嚆矢)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글의 보급에 유력한 공적을 남겼으며, 보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기독교의 광범한 선교를 이룩하여 한국의 봉건적인 생활양식을 지양(止揚)시키면서 현대적인 생활의식9이것을 「지성」이라고 해도 좋다.) 속에 침잠(沈潛)하므로써 정신사(精神史)의 새로운 국면(局面)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한국의 현대문학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러한 일면이 특히 소설작품 속에 어떠한 형태로 반영되었으며 또 작가들이 그것을 어떠한 태도에서 수용(受容)하고 있는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는 바로 기독교가 한국 사람의 생활의식 속에 어떠한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비단 문학적인 관심만이 아니라 기독교자체의 관심이기도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