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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김우규 <필자-문학 평론가>
     A.「사랑」이 주제가 된 작품들
이에 해당되는 것은, 그것이 「희생」의 형식으로 나타나든, 「봉사」의 형식으로 나타나든, 혹은 「용서」의 형식으로 나타나든간에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와 근사치(近似値)를 인정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또 이런 작품이 분류해 본 결과 가장 우세한 비율을 보기고 있다.

 이광수(李光洙)의 「再生」「흙」

이광수는 한국의 신문학이 현대문학으로 이행(移行)되는 과도기에 서서 현대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한 작가다. 그러한 이광수에게서 기독교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의의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정신이 한국문학을 통해서 걷은 최초의 결실(結實)이 현대문학의 출발과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현저한 실증을 「再生」「흙」등의 대표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再生」은 이광수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이 최초로 반영된 작품으로서, 자기 희생을 통한 사랑의 윤리가 중심테마가 되고 있다.

-전략-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인 사상이 점차로 그의 정신적 사상적 내용의 거의 전부를 형성해 감에 따라 그는 도리혀 종교적인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의 이상(理想)을 발견한 것은 기독교였다. 기독교에서 자기의 이상을 발견한 춘원(春園)의 사상은 「再生」으로서 대표된다. 「再生」은 「순영」이라는 일여주인공(一女主人公)의 타락과 재생을 취급한 작품이다. 「순영」의 재생의 동기를 기독교의 교리와 관계시키고 마지막 자살하는 순간까지 찬송가가 「순영」의 귀에 들리게 하고 선교사「P부인」의 입을 통한 기독교적인 희생관(犧牲觀)같은 것은 이 작품에 일관된 기독교적인 주조(主調)와 함께 춘원의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대변하는 것이다.
-조연현지음 「韓國現代文學史」에서-

이상의 인용문에서 지적된 「기독교적인 희생관」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복음서에서 강조하는 「사랑」의 윤리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작중인물(作中人物)들의 대화에서 얼마든지 산견(散見)f된다. 그 대표적인 예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진정으로 순영을 사랑하였음이라 하면 나는 오직 그의 행복만 도모할 것이 아닌가. 비록 그가 나를 길가에 내어버리더라도, 그가 나를 발길로 차고 또는 나를 죽이더라도, 진실로 내가 그를 사랑한다 하면 이런 일이 있더라도 나는 결코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함이 없이 끝까지 그를 사랑하고 그의 행복을 빌어야 할 것이 아닌가. -중략- 보라 예수께서는 어찌하였는가? 십자가에 달려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다는 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복을 빌지 아니하였나- 이것이 진실로 사랑이다.

이상과 같은 <아가페>-무상(無償)의 사랑은 바로 복음서에서 제시된 윤리의 총화(總和)로서, 춘원은 그것을 체현(體現)한 최초의 작가이며 그의 영향력은 후대(後代)의 많은 작가들에 의해서 실증(實證)되고 있는 바다.

그 다음으로 장편소설 「흙」 역시 자기 희생을 통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춘원의 민족주의적 이상(理想)이 농촌계몽이란 과제로서 귀착(歸着)되면서 어느 한 개인보다도 「민족」과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자기희생으로 나타나 있는 점이 「再生」과는 다를지 모르나, 그것도 결국은 「再生」에서 보여준 희생정신의 확대라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서는 오직 민족주의적 이상(理想)만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허숭」을 통하여 대변시키고 있는 사랑의 윤리는 「再生」의 그것을 그대로 연장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허숭」이 자기 아내와 불의(不義)의 관계를 맺은 「갑진」에 대한 태도를 말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그대로 「再生」에서 볼 수 있는 자기 희생의 사랑과 동질(同質)의 것이다.

용서하라……하는 예수의 가르치을 생각하였다.…… 만일 한 선생님이라면 어떠한 태도를 취할까. 1. 사랑과 의무의 무한성. 2. 개인보다 나라. 이러한 근본조건에서 생각을 시작할 것이다. 사랑이란 무한하지 아니하냐.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나 동무나 나라에 대한 사랑과 의무는 무한하지 아니하냐.

이리하여 「허숭」은 「갑진」에게 용서한다는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허숭」의 인간성은 춘원의 대표적인 이상(理想)의 화신(化身)이거니와 그 이상(理想)의 거점(據點)은 어디까지나 복음서의 정신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작자가 「허숭」의 독백을 통하여 표명한 「무한한 사랑, 무한한 용서, 무한한 의무, 무한한 사랑, 무한한 용서, 무한한 의무, 섬김, 나를 죽임, 섬김, 나를 죽임…… 무한한 사랑, 무한한 의무」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춘원의 초기작품들이 대체로 기독교정신을 철저하게 받아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춘원의 문학이 중반기(中半期)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보다 불교적인 방향으로 흘렀는데, 가령 같은 사랑의 문제를 취급한 것이면서도 「사랑」에 와서는 거기에 기독교적인 것보다는 불교적인 인생관이 기조(基調)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는 춘원의 업적은 주로 초기의 작품에 해당되는 셈이다.

 전영택(田榮澤)의 「남매」「외로움」「집」「소」

늘봄 전영택의 작품경향은 一九三九년에 발표된 「남매」를 기점(起點)으로 해서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전기의 작품이 주로 자연주의 계열(系列)이라면 후기의 것은 기독교적 인도주의(人道主義)의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기에 속하는 작품에서는 기독교적 요소가 거의 반영되어 있지 않은 대신 「남매」이후의 후기 작품에는 기독교적인 생활감정이 짙은 농도(濃度)로 투영(投影)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남매」「크리스마스 새벽」「외로움」「집」「소」등이라고 생각된다. 이 중에서도 「외로움」「집」「남매」등 세 작품은 각각 그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인식이 주조(主調)된 작품으로서 늘봄의 신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남매」는 기구한 환경 속에 자라온 두 남매의 애련한 정의(情誼)를 그린 작품인데, 그것을 단순한 혈연관계로서만이 아니라 신앙적인 생활감정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작품 「집」에서는 기독교적 요소를 전면(前面)에 노정(露呈)시키고 있지는 않으나 옛날에 심한 냉대를 하고 쫓아 내기까지한 옛날 집주인이 피난통에 처지가 바뀌어 자기 집에 찾아들게 되자 오히려 후대하는 「달보」의 태도는 역시 관용(寬容)의 미덕으로 나타난 기독교적 사랑에 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방 직후에 발표된 작품「소」에서 이미 시사(示唆)한 바 있는 이 작가의 인간적인 생리의 발로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집」은 그것을 어디까지나 인정적인 각도에서 취급한 데 비하여 「소」는 그 씨츄에이슌을 양단된 조국의 비극적인 현실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이데올로기적인 저의(底意)까지도 곁들이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작품「외로움」은 봉사와 고난에의 인종(忍從)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어느 교직자의 심적갈등과 함께 추구한 것으로서 늘봄의 기독교적 의식이 가장 고조(高調)된 작품이다. 주인공 「그」는 미국서 돌아온 유능한 교직자이면서도 저마다 가기 싫어하는 가난한 벽촌교회에 자진해 가서 시무를 하면서 온갖 시련을 겪는다. 그리고 교인들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감내해가면서 봉사한다.
-오형,
우리 기봉이는 갔다오.
봉산에서 그 아이를 얻은 것을 기념으로 이 땅 사람이 되려고 했더니, 기봉이를 데려가셨다오.
당신의 말이 과연 옳구려. 이 고장에 안올 것을 왔다고…… 우리 기봉이는 먹지 못해 굶어 죽었다오. 기봉이를 잃은 우리는 하루도 이 곳에 머물러 있기 싫어서 곧 떠나려고 하였오. 그러나 형이여, 염려마시오. 「안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시련이지요. 기어이 여기서 살아서 당신의 뜻을 실현시키고야 맙시다」하는 아내의 힘있고 고마운 말에 머물러서 이 동선리 농민의 벗이 되기로 하였오.

이것은 「그」가 자기 친구한테 보낸 편지다. 이렇게까지 참담한 역경을 견디어내면서 목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터무니없는 모략을 받고 서울로 떠나오게 된다. 그러자 벽촌에서 얻은 병이 악화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오히려 죄책(罪責)을 느끼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 지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돌아가실 때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옳다. 내가 봉산 동선리 친구들과 같이 살면서 같이 고생을 겪을 걸 피하고 와서, 그 고생을 내 몸으로 맡아 당하게 되는 거다. 내가 질 것을 져야하는 거다. 약속한 것은 이행해야 하는 거다. -중략-
「여보, 우리 봉산으로 도루 갑세다. 응,」 그는 다시 돌아 누우면서 아내의 손을 붙잡고 조르듯 말한다.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그」의 신앙태도는 의무감이상의 강한 사랑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박계주(朴啓周)의 작품

1938년에 장편「殉愛譜」를 발표하므로써 본격적인 대중작가로 출발한 서운(曙雲) 박계주의 소설은 거의 예외없이 애정문제를 취급하고 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철저하게 기독교적 윤리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요한 작중인물(作中人物)은 거의가 크리스챤의 이상적 타잎이다. 이런 점에서 박계주야말로 기독교적 테마를 의식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라고 하겠다. 이것은 서운의 대표작들인 「殉愛譜」「愛路歷程」「眞理의 밤」「久遠의 情火」 그리고 근작(近作)인 「자나깨나」등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시인(是認)하리라고 믿는다. 이 점이 우리가 대중작가라고 해서 간단히 경멸해 버릴 수 없는 서운문학(曙雲文學)의 중요한 특색이기도 한 것이다. 서운은 확실히 명확한 기독교적 이념을 기조(基調)로 하여 애정문제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가 작품의 서두에 항상 성구가 아니면 경구(警句)를 내세우는 것도 그러한 의식적인 태도의 표명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테마의 설정을 성서적인 교훈에서 연역(演譯)하려는 노력을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보리 알 하나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가 맺히리라.
-「殉愛譜」의 서두-

진리(사랑)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리라.
-「眞理의 밤」의 서두-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고
투기(妬忌)는 지옥과 같이 잔인하도다
-「久遠의 情火」의 서두-

참된 사랑은 개시(個我)의 행복의 포기의 결과다.(톨스토이)
-「愛路歷程」의 서두-

이상 열거(列擧)한 성구나 경구는 작자가 주제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얼마만치 성서적인 정신에 의거하고 있는가를 암시해 주거니와, 사실상 그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은 그의 작품자체이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교리적인 논의(論議)를 취급한 것으로 유명한 「愛路歷程」중에서 「사랑의 倫理」란 장(章)은 특히 서운의 애정관을 신부의 입을 통하여 표명한 것으로서 주목할만한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이 죽는다는 것은 이 우에 더 없는 행복의 하나이라 생각하네. 「나」만을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처럼 더 큰 부끄러움이 또 어디 있겠나.」
신부는 숨을 돌려가지고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결코 임군더러 이러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권하려 하지는 않네. 사람은 어떠한 일을 하든지, 그 직장에서 최선의 노력과 충성을 다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그 노력이나 충성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러한 비극이 어데 있겠나. 사랑에는 「나」라는 것이 없네.」
신부는 말을 잠깐 끊드니,

「나는 임군에게 물려줄 유산이 없네만는 그 대신 상속해줄 말이 있네. 붓과 종이를 가지고 와서 받아쓰게.」한다.
이리하여 신부가 불러준 「사랑의 윤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랑에는 「내」가 없다. 「남」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 사랑은 가지는 것이 아니오, 주는 것이다.
셋째, 사랑은 하나님처럼 약하다. 그러나 그 약함이 곧 강한 것이니라.(여기서 「하나님처럼 약하다.」는 것은 무저항주의적인 태도를 의미한다고 부연되어 있다. -필자-
넷째, 사랑은 기억보다도 망각(忘却)을 즐겨한다.(여기서 「망각」이라는 것은 남의 허물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필자)
다섯째, 사랑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현재만 있을 뿐이다. 즉 현재의 활동만을 생명으로 삼는다.
여섯째, 사랑은 언제나 미찌고 잃는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를 얻는 상업이니라, 그렇다고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일곱째, 사랑은 보상(報賞)바라지 않고 대가(代價)도 바라지 않는다. 사랑은 끝까지 무조건의 노력이다.
여덟째, 사랑은 현재를 만족한다.
아홉째, 사랑은 죽음을 영원한 동행자로, 반려(伴侶)로, 배우자로 삼는다. 즉 사랑은 죽음의 연쇄(連鎖)다.
열째, 사랑은 죽음이다. 즉 희생이다.
열한째, 사랑은 학설이 아니고, 지식이 아니고 말이 아니다. 생활이다.
열두째, 사랑이 있는 마음은 천당이오, 사랑이 없는 마음은 지옥이다. 사랑보다 더 부한 재산도 없고, 사랑보다 더 위대한 종교도 없고, 사랑보다 더 평화로운 낙원도 없고, 사랑보다 더 질서 있는 세계도 없다. 오직 사랑으로써만 완전한 생(生)의 실현이 있나니, 사랑은 인생의 생명이니라.

이상이 사랑에 대한 「신부」의 신조요, 동시에 서운이 추구하는 사랑의 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정관은 그보다 앞서 「殉愛譜」에서 「사랑에 순(殉)하는 순애(殉愛)의 사도(使徒)들이요, 십자가의 사자(使者)들인 「문선」이나 「명희」나 「철진」이나 「혜순」이나 「황인수」등을 통하여 이미 대변시킨 바 있었지만 그것은 그 뒤에 나온 「眞理의 밤」이나 「자나깨나」「날개없는 天使」등의 작품을 통해서 일관된 테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眞理의 밤」의 경우…… 장편 전체의 사건이 시간적으로 모두 「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채로운 이 작품은 청년 예술가인 「지운」이 창녀들의 구제책(救濟策)을 위해서 시작한 사회사업을 취급한 것이 내용인데, 주인공 「지운」의 생활태도 역시 「愛路上程」에서 「신부」를 통하여 대변시킨 사랑의 윤리의 구현(具現)이었다. 그것을 작자는 이 작품의 결말에서 창녀였던 「설영」이의 입을 통하여 증언(證言)케 하였다.

-전략- 숙녀가 다 무에며, 영양이 다 무에냐, 그들에게 눌려서는 안된다. 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반발적인 항거심에서 저는 제 육체로 정복해버리려고 어느 날, 새벽 가까이 잠옷 입은대로 지선생의 침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지선생은 나가기를 명령했습니다. 세 번이나 명령했습니다. 저는 다시 치미는 굴욕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여, 그러나 나와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지선생의 방에서 잠옷입고 나오는 것을 동거하는 청년-여러분도 신문에서 보아 아시겠지만, 마리아의 집 기숙사에 그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구실로 돈을 주어 나가달라 해도 나가지 않고 여인 기숙사에 눌러 있어 구제품을 모리했다고 경찰에 투서하여 지선생을 잡혀가게 했고, 또 뜰의 풍치림을 자르지 말라고 했다고 테로를 가하여 지선생을 하여금 입원하게까지 했던 청년중의 한 사람이 보았었습니다. 그의 투서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어쨌든 그날 신문은 다투어 지선생을 색말 만들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지선생은 저와는 반대로 또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사업을 위해 고락을 함께 하던 저를 고얀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를 변호하는 것으로써 청년 두 사람까지라도 나쁜 사람으로 지적하지 않기 위해서 침묵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중략-
이리하여 저 때문에 지선생은 명예도 잃고 사업도 잃고 애인도 잃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가방 하나를 들고 마리아의 집을 나섰습니다.

이상 「설영」의 말로서 주인공「지운」의 생활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요컨대 작자는 자기 희생과 인종(忍從)과 봉사를 통한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인물을 무턱대고 성자처럼 미화(美化)시키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약점은 약점대로 시인하면서, 그러기 때문에 심각한 내적갈등(內的葛藤)을 표출(表出)시키면서, 다시 신앙적인 의지가 그것을 극복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자가 휴매니티를 결코 안의(安易)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깨와 가슴이 반이나 드러나게 하고 허리가 짤룩한, 그리고 신부의 옷처럼 다리를 휘감아 철철 방바닥에 흐르는 안개같은 옷, 그 옷을 통하여 환히 들여다보이는 육체…… 지운은 눈을 감았으나, 그 모두가 그냥 눈앞에 또렸하다. 그는 다시 한숨을 삼킨다.

한녀의 얼굴이 떠오르고, 「마리아의 집」이라는 사업체가 눈앞에 전개될 때, 지운은 더욱,
(안된다. 안된다)하고, 속으로 부르짖는다. 그러한 또 다른 자기의 음성을 듣는 지운은 비로소 눈을 뜨며 머리를 서서히 돌린다. 또 다시 옷을 통하여 보이는 설영이의 하아얀 두 발, 그리고 두 다리, 그 이상 그는 시선을 올리지 못한다.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무엇보다 치렁치렁하고도 강한 정육.

그러나 그 정욕에 정비례하여 자기 아닌 자기를 속에서 축출함으로써 진정한 「나」를 지키려는 굳센 정신의 힘.

그 두 힘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하던 지운은 이윽고 더 무거워지는 의지의 저울추의 힘을 빌어,
「어서 나가주시지요.」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이 아니고 애걸이다.

지운은 또 대답을 못한다. 그는 「여자를 보고 음심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니라」는 성서(聖書)의 기록을 생각할 때, 자기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자요, 거기에 대하여 아무 변명할 길이 없는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비록 자기가 마음으로의 간음조차 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자기를 변호하는 것으로써 설영이를 나쁜 여자로 만들거나, 기석이를 무고죄(誣告罪)에 걸어 고생하도록 할 수는 없다. 이래서 십자가(十字架)는 필요하지 않았던가. 그렇거늘, 자기는 이미 음욕에 피를 끓게 했던 범죄자임에랴…… 지운의 입에는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내적갈등에서의 신앙적 고민은 「자나깨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나깨나」는 「법(法)의 질서」와 「사랑의 질서」를 대결시키면서 법의 질서의 무력(無力)을, 신앙의 질서에 의해서 환기시키는 과정을 취급한 작품으로서 전자를 「권태섭」으로, 후자를 「서명환」으로 각기 대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법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기보다 법의 기능을 세속적인 처세수단으로 악용하는 「권태섭」적인 법의 횡포에 대하여 항거한 것으로서 작자는 「서명환」의 입을 통하여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권태섭은 검사요, 서명환은 고아원을 경영하는 신학교졸업생이다. 그런데 권이 서명환의 약혼녀를 야비한 수단으로 유혹하여 부당하게 소유한다. 그런데 바로 결혼식을 하는 그 날, 공교롭게도 어떤 여인이 애기를 맡기러 왔다. 여인의 사연을 듣고 난 서명환은 그 애기가 권의 아이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리하여 서명환에게는 복수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내가 왜 하나님을 원망하느냐. 모두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다. 일직이 「욥」에게 내리셨던 시련이요, 예수가 지셨던 십자가의 천만분지 일이나마 체험하게 하는 하나남의 선물이다. 나는 나에게 내린 십자가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을 원망해서도 안되지만 세상의 아무도 원망하거나 저주해서도 안된다. 나를 이기자. 신앙을 잃지 말자. 원수의 아들을 나는 내 아들로 기르자.)하고 속으로 울부짖는다.

그러나 서명환이도 성자가 아니고 인간이었다. 인간이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러한 소리가 일어났다.

(못난 자식! 바보! 너는 네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그런 방탕한 자에게 가도록 내버려 두느냐. 진주가 돼지 울에 떨어져 짓밟히는 것을 그냥 보고 내버려두어야 하느냐. 악마에게 유혹 당해가는 순결한 처녀를 너는 모른 척해야 하느냐. 너의 직업은 악에서 착한 것을 건져내야 하며 악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 아직 늦지 않다. 이미 결혼식이 끝났다 할지라도 아직은 초저녁이다. 너의 애인은 아직 처녀대로 있다. 지금 네 앞에 앉은 여자를 권태섭이와 최영희가 있는 데로 데리고 가서 권태섭이의 아내와 아들은 여기 있노라고 말하여라. 악을 응징해야 한다. 불의는 징계해야 하고 없애 버려야 한다. 어서 번민하지 말고 네 앞에 앉은 가련한 여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어서 속히 데리고 권태섭에게로 가라.)

이것은 신앙에서 살고 성직에 생애를 바치려는 서명환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유혹의 소리였다. 남의 신혼가정을 더구나 첫날밤을 방해하고, 파괴하고 망신 주고……. 이를테면 복수에서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앞에 앉은 가련한 여자를 위해서 데리고 간다는 것은 하나의 구실이다. 복수하기 위한 무기로 이용하려는 것뿐이다. 권태섭은 이 여자가 애기를 낳았다고 해서 데리고 살 사람은 아니다. 나는 비열한 수단으로 복수해서는 안된다. 권태섭의 결혼을 방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고 보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리어 최영희는 그러한 나를 비소하리라. 나는 역시 성직자답게 내 원수인 권태섭의 아들을 내 아들로 길러야 한다. 그리고 권태섭이 버려준 이 불쌍한 여자를 구하여 줘야 한다. 지금 무슨 직장에 있는지는 몰라도 만일 옳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서 건져내어 바른 길을 걷도록 선도해야 한다.

이리하여 서명환의 전락(轉落)을 환기시키므로써 사랑의 질서의 종국적(終局的) 승리를 시사(示唆)해 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서운 박계주의 기독교적 윤리에 대한 파악은 이광수의 그것을 한층 심화(深化)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내적갈등에 의한 신앙적 고민을 추구한 것은 인물을 다분히 관념의 화신(化身)으로 설정하는 춘원의 이상주의적 인간성 파악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춘원의 작품에서처럼 그것이 생경(生硬)한 설교로 들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요컨대 서울의 오랜 문학적 노작(勞作)은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투절하게 탐구해 왔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기독교소설에 있어서 하나의 기념비적 이정표(里程標)를 세워 놓았다고 본다.

 심훈(沈薰)의 작품

농촌계몽운동에 적극적인 열의를 보인 바 있는 심훈은 춘원 이광수와 같은 계열의 민족적 이상주의 정신을 사상적 기조(基調)로 하고 있다. 그러한 심훈의 정신적 요소가 가장 현저하게 반영된 작품으로서 우리는 최후의 장편소설「常綠樹」를 기억하고 있다. 이것 역시 춘원의 경우처럼 민족주의적 이상(理想)이 농촌계몽이란 형식으로 나타난 작품으로써 그 정신적 기조(精神的基調)는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적 이상과 함께 기독교정신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이것은 실재(實在)했던 인물 채영신(蔡永信)을 모델로 한 농촌계몽소설로서 채영신의 강열한 애국정신과 자기희생의 정신이 융합된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감동적인 필치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주인공 채영신의 그러한 생활태도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는 것은, 그녀가 임종하기 직전에 교인들이 모여 기도한 대목만으로도 충분이 짐작이 간다.

한편으로 교인들은 예배당에 모여서 밤늦도록 기도를 올린다.
「저희들을 창조하시고 길러주시는 아버지시여, 당신이 모처럼 이 땅에 내려보내신 귀한 따님을 왜 어느새 부르려 하십니까. 이것이 과연 당신의 뜻이오니까. 그 누이는 이 곳에 와서 무식한 저희들을 위해 뼈가 깎기도록 일을 했습니다. 육신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는 그 시각까지 불쌍한 조선의 자녀들을 위해서 걱정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지은 학원 하나를 붙잡으려고 온갖 고생을 참아 왔습니다. 주여, 그는 청춘입니다. 열매도 맺어보지 못한 순결한 처녀입니다. 인생의 기쁨도 즐거움도 맛보지 못하고 다만 당신 한 분을 의지하고 동족을 사랑하므로써 그 귀중한 몸을 바쳤습니다. 주여! 오오 사랑이 충만하신 주여! 그에게 생명수를 뿌려주소서! 저희들의 천사인 채영신 누이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우리 「청석골」에서 떠나지 않도록 붙들어 주소서!」 「아아멘」을 부르는 남녀고인의 목소리는 일제히 울음으로 변하였다.

 김말봉(金末峰)의 작품

김말봉(金末峰)은 여류작가로서는 대담할 정도로 처음부터 「密林」이나 「찔레꽃」같은 대중소설을 들고 데뷔한 작가다. 그러니만치 이만한 용단 속에는 적어도 어떤 의욕이 뒷받침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작품 「生命」을 중심으로 하여 「愛情의 倫理」란 글에서 언급한바 있었기에 그 중요한 대목만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그것을 (대중작가로서의 의욕) 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싶다.
첫째는 대중소설에서 「저속성」을 지양(止揚)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중략- 즉 씨는 그러한 「저속성」을 순화(醇化)시키고 나아가서 건전한 「대중성」을 지향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략-
어느 지면에서인지 씨는 「센키비취」의 「쿠오·바디스」나 「유고」의 「레·미제라불」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뜻의 말을 한 적이 있다고 기억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씨가 보는 대중소설의 이상적(理想的)기준은 결국 「쿠오·바디스」나 「레·미제라불」정도라고 할 수 있고 씨 자신의 작가적 포부도 그러한 작품을 쓰는데 있다고 보아서 틀림없을 것이다.

또 그러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의욕 속에는 적어도 진정한 문학작품은 원칙적으로 숭고한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감동적인 것 그리고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하나의 신념이 자리잡고 있으리라는 것도 아울러 추단(推斷)할 수 있다. -중략- 적어도 이러한 신념에 입각했다면, 보다 많은 대중독자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당연히 대중소설의 형태를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가 대중작가로 출발했고, 또 그것을 자처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이상과 같은 의욕이 뒤받침되고 있었다고 보아서 별로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김말봉씨가 그러한 의욕을 작품상으로 어느 정도 구체화시키고 있는가에 귀착된다. 또 그것이 작가 김말봉씨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유력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여기서 편의상 씨의 최근작 「생명」을 놓고 그것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이상 말해 온 바에 비추어 비교적 많은 논의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뿐더러, 실상 씨의 작가적 의욕이 집주(集注)된 대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육체문학이라고 해서 비난까지 한 일이 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일단 검토되어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중략-

이로써 알수 있듯이 이 작품은 결코 육체문학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김말봉씨를 대신해서 그런 일부의 편견을 시정하자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앞서 말한 씨의 대중소설에 대한 의욕이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는가를 검토하려는 데 있다.

첫째, 씨가 자기자신의 소설에서 얼마만큼 저속성을 지양(止揚)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성공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선 문학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을 찾아볼 수 없다. 한마디로 본격적인 메로·드라마인 것이다. -중략-

다음으로 「숭고한 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감동적인 것」과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의욕은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가? 그것은 물론 모든 대중소설이 추구하는 거의 공통된 테마이긴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걷우었다고 본다. 특히 그러한 테에마를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에 의거해서 추구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우선 주인공 「전창님」의 현실에 대한 강인한 대결과 인종의 미덕은 그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신앙의 소치(所致)였던 것이다. 그리고 뱃 속에서 자라고 있는 또 하나의 생명에 대한 엄숙한 책임감 역시 여기서는 신앙과 결부시키므로써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창님의 생활태도가 마침내는 「김정미」를 감화시켰고, 나아가서 「설병국」의 탈선을 돌이켰던 것이다. 창님이가 승리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윤리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애정의 윤리다. 애정을 단순한 감정유희(感情遊戱)나 관능의 변형으로서가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교섭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이 그 윤리의 태도를 한결 더 짙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김말봉의 작품「生命」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됐으리라고 믿거니와 요컨대 김말봉은 애정문제를 취급할 때 항상 기독교적 윤리의 조명(照明)을 투영(投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대중작가라는 인상을 경멸감으로만 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임옥인(林玉仁)의작품

「越南前後」를 발표하기 이전까지의 임옥인의 특색은 애정을 항상 서정적(抒情的)으로 처리한다는 점에 있었다. 즉 애정에 어떤 윤리적 근거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태도는 윤리 문제로서의 애정을 현실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현실도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옥인의 문학정신 속에 일관된 리리시즘을 무시할 수 없다면 그것은 현실도피라기보다도 현실의 혼란을 서정적으로 초극(超克)하려는 자기폐색(自己閉塞)의 경향에서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임옥인은 항상 관념적인 스테이지를 가설(假設)해 놓고, 거기에서 애정을 심미적(審美的)으로 순화(醇化)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서정적인 노력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기대도 가질 수가 없다. 아니, 그것이 현실에 직면할 때는 오히려 환멸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임옥인의 「해바라기」같은 작품이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임옥인 자신도 그것을 오랜 시련 속에서 확인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의 대표작인 「越南前後」에 와서는 애정문제가 자기폐색(自己閉塞)의 상황에서가 아니라 보다 확충된 공간(空間)을 향하여 제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자체도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설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애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성질의 사랑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임옥인은 그것을 「자비」라고 불렀다. 본래 수기체(手記體)로 된 이 작품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이념적 대결을 자기 개인의 체험을 통해서 취급한 것으로 여기서는 이미 종래의 서정적 처리방법이 일소되고 있다. 다음의 대목은 「장순희」란 여인이 「나」에게 하는 대화.

「형님!」
장순희는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저 사람들(공산주의자)이 무자비한 투쟁을 한다면, 우린 자비로써 투쟁해야 잖어요?」
내게는 장순희의 확고한 신념의 고백이 무척 반갑고도 든든하게 들렸다. 「그렇지, 무자비한 투쟁에 대한 자비의 투쟁이!」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장순희는 둥굴고 부드러운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우며 마치 성경 구절을 낭독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린다.

「자비의 투쟁」이란 역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로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과의 대결 속에서만 그 윤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애정에 윤리적 근거를 부여하지 않던 종래의 리리시즘에 대한 윤리적교정(倫理的矯正)을 가(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또 그러한 의미에서 금후의 임옥인의 노력에 어느 정도 기대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이종환(李鍾桓)의 작품

기독교적 이념(理念)의 실천을 통하여 현실의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작가가 바로 이종환이다. 이종환은 또한 그러한 실천 속에서 새로운 휴매니즘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이 경우, 그가 내세우는 기독교적 이념은 결국 사랑의 윤리에 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 우선 주목된다. 이것은 그의 대표작인 중편소설「人間譜」에서 이미 암시되었고, 그 뒤에 발표된 「면도날」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주제상의 의욕이기도 하다.

「人間譜」의 경우…… 「人間譜」는 창녀로 전락(轉落)한 「쥬리애」란 여인의 내적갈등(內的葛藤)을 그린 작품이다. 그 내적갈등은 「쥬리애」에게 있어서는 퇴폐적인 정열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순수한 인간적인 의지와의 대결로서 조성되고 있다. 그런데 작자는 여기서 황일호라는 성실한 선의(善意)의 인간을 안배(按配)시키므로서 쥬리애의 내적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황일호의 생활로서 대변되고 있는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향하여 한걸음 닥아서게 된다. 결말에 가서 쥬리애가 자학(自虐)속에서 스스로를 파열시키는 것은 일견(一見) 그녀가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결국 아무런 기대를 걸 수 없었다는 허무적인 반발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닥닥 뒤쳐 일어나, 퍼런 불꽃이 뚝뚝 듣는 눈으로 거울 속 제 몸뚱아리를 막 삼켜들 듯 노려 보고 섰던 쥬리애는, 「고깃덩이! 고깃덩이! 고깃덩이!-」
온 몸을 버르릇! 떨면서 고함을 치고는, 손에 잡히는대로 거울을 향해 마구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거울 속의 쥬리애를 후려 갈기는 것이었다. 쥬리애의 몸뚱아리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싯뻘걸 고깃덩이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크림통, 기름병, 향수병들이 날았다. 짤깍짤깍 부딛쳐서는 박산박산 깨어져 떨어졌다. 마지막에 들린 것은 전기 대리미였다. 원반 선수처럼 한 바퀴 힘껏 휘둘러 내던졌다. 땅!- 그 큰 거울이 좌르르 깨어져 쏟아진 침대 위에, 찢어지는 외마디 기성을 지르며 쥬리애는 쓰러졌다.

「人間譜」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것은 확실히 자기파멸에의 허무적인 정열의 연소(燃燒)다. 그렇게 때문에 「쥬리애」의 퇴폐적인 정열과 순수한 인간적인 의지와의 대결로서 조성된 내적갈등은 극복되어 진 것이 아니라, 방기(放棄)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쥬리애」의 그러한 행동 속에 나타난 역설적(逆說的)인 의미다. 「쥬리애」의 자기파멸은 「쥬리애」 전부의 파멸이 아니라 육(肉)에의 결별(袂別)을 위한 파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쥬리애」의 자기반발은 곧 자신의 전락(轉落)을 환기시키는 윤리적각성(倫理的覺醒)을 실증해주는 셈이 된다. 작자는 여기서 「쥬리애」에게 어떤 구원의 조치(措置)를 베풀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는 「쥬리애」의 자기반발에서 구원의 가능성만은 예상(豫想)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윤리적 각성의 내적계기(內的契機)가 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는 「황일호」의 행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쥬리애」의 내면 속에 작용하던 인간적인 선의(善意)가 「황일호」에 의해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일호 곁에까지 다 와가지고 쥬리애는 후딱 뒤로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일호는 환자(천연두환자-필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니 입을 맞추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입을 우물우물하며 환자 입에 무얼 넣어주는 모양이었다. 그제사 그의 손에 씹다 남은 사과가 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일호와 얼굴이 마주치자 쥬리애는 눈물이 고였다. 무엇 때문인지 몰랐다. -중략-
-내가 일호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을가. 하는 의혹이 왔다.
자기의 생활신조를 따라 물불을 헤아릴 겨를 없이 「참」의 삶을 경건하게 충실하게 실천하는 일호 앞에 발거름을 맞출 자신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혼하자는 일호의 말이 진정이라면 진정일수록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슬펐다.
여기서 「쥬리애」는 이미 「황일호」의 <참>앞에 설복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시 황일호가 죽고난 뒤에 더욱 명확해 진다.

원아를 간호하다가 희생된 줄은 알지만, 죽어가는 아이에게 사과를 씹어 입으로 먹여 주는 황일호를 본 사람은 쥬리애 자기밖에 없으리라. 마치 신문에 황일호가 양공주와 도색유희를 했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나 했지, 황일호의 「참」과 「참」에서 울어나오는 거룩한 정신을 진정으로 받아 체험하기는 쥬리애 자기 밖에 없듯이.

이로써 우리는 「쥬리애」의 자기반발이 곧 「육(肉)에의 결별(袂別)」을 위한 것이요, 그것은 또한 자신의 전락에 대한 윤리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각성의 계기는 바로 「황일호」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접촉된 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동시에 이종환의 의도는 기독교적 생활윤리를 사회적인 혼란과 무질서에 대결시키면서 그 윤리적 우위성(優位性)을 강조하려는데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적극적인 형태로 구현(具現)된 것은 아니지만.

이상에서 말한 이종환의 기독교적 윤리에 대한 의욕은 작품「면도날」에 와서 더욱 명확하게 표명되고 있다. 주인공 「경수」는 사변 당시 아버지를 잃은 뒤 이발사가 되어, 그 때 아버지를 죽인 한기주가 나타기만 기다린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다. 그런데 어느날 이발소에 한기주가 나타났다.

-사년동안 이를 갈고 벼르던 결행의 순간이 닥쳐온 것이다. -중략-
면도칼을 숫돌에다 몇 번 갈아가지고 다시 가죽에다 썩썩 문지르면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에 전신의 힘을 모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손은 더욱 후둘거렸다.
솔로 비누칠을 했다. 온 얼굴과 턱 아래까지 했다. 면도칼을 댔다. 목 한 가운데 불록한 우릿대뼈를 스치고 지났다. 다시 거기께에 면도날이 지난다. 우들우들 날이 뛴다. 숨을 크게 들여마시며 손에 힘을 바싹 주고 꽉 누르려는 찰라였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원수를 사랑하라.
예배당 안으로 한기주에게 끌려가면서 뒤로 돌아보던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이!」
경수는 면도칼을 떨어뜨리고 한기주를 껴안으며 엉엉 울음을 놓았다.

너무 작위적(作爲的)으로 처리된 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윤리적 당위(當爲)는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능히 수긍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우리나라의 기독교적 소설에서 시도된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적 탐구를 대강 검토한 셈이 된다. 동시에 그것이 대체로 용서와 봉사와 그보다도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사랑의 기독교적 의미를 일단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 언급한 작가들의 노력을 우리는 고맙게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도 구체적인 현실문제로서 보다도 다분히 추상적인 개념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경향만은 지양(止揚)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레엄·그린은 그의 대표작「사건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에서 애정의 삼각관계(三角關係)를 비극적인 <신(神)과의 대결>에까지 심화(深化)시키고 있거니와, 기독교적 소설이 추구해야 할 애정(사랑)의 윤리도 추상적인 규범(規範)의 적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神)과의 대결이라는 구체적인 신앙문제의 일환(一環)으로 수용(受容)할 때, 비로소 그것은 특수한 형태의 윤리적 기여(寄與)를 하게 될 것이다.
 
   [머리말] 성서의 우리말 번역과 그 문화사적 공헌

   [본론] 한국 현대소설에 반영된 성서의 영향

    (제1장) 성서의 기사(記事)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제2장) 성서의 정신을 주제(主題)로 한 작품들

   A.「사랑」이 주제가 된 작품들

    B.「회개」가 주제로 된 작품들

    C. 반바리새주의 정신이 주제로 된 작품들

    D. 기타

    (제3장) 성서적 진리를 의곡(歪曲)한 작품들

   [맺는말] 성서와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