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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김우규 <필자-문학 평론가>
     C. 반바리새주의 정신이 주제로 된 작품들
순수한 신앙의 입장을 옹호하고자 할 때, 그와 대립되는 세속적인 요소를 거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경로(經路)다. 신앙의 입장은 항상 반세속주의적 성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도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저희(세속주의)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리고 순수한 신앙을 위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그 바리새인들의 세속주의를 탄핵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신앙이 세속주의를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배제(排除)하는데서 성립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제 이와 같은 세속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을 가(加)한 작품들을 들어 그 비판의 대상과 그리고 그 비판의 방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임영빈(任英彬)의 경우

석계(石溪) 임영빈은 1925년, 당시 춘원이 주재(主宰)하던 「朝鮮文壇」에 작품「亂倫」을 내놓음으로써 떼뷰한 작가다. 그 뒤에 이어서 「序文學者」「사랑의 모험」「閔氏의 土曜午後」「準狂人傳」등의 단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워낙 과작(寡作)인데다가 어떤 특징적인 문제성(問題性)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소홀히 평가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근래에 발표된 작품들은 초기의 작품에 비하여 훨씬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종래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기독교적 테마를 본격적으로 취급한다는 점과 작가의식이 그러한 방향으로 강하게 집약(集約)되고 있다는 사실로서 충분히 입증되는 바다. 그동안 상당한 기간에 걸쳐 침묵을 지켜왔고 또 현재 연령적으로 노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러한 작가적 의욕을 보여준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현상이 아닌 수 없다. 특히 근래에 발표된 것 중에서도 「啓示」(최근에 나온 「石溪創作集」 속에 수록되어 있음)란 작품은 과거의 어떠한 작품보다도 뛰어나는 것으로 이 작가의 건필(健筆)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작품을 중심으로 임영빈의 작품세계를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이 작품을 일고 최초로 발견할 수 있는 현저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유모러스한 싸타이어(諷자)다. 이것은 비단 「啓示」에만 한(限)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얼마든지 산견(散見)되는 이영빈 특유(特有)의 작가적 태도이기도 하다. 일찌기 「朝鮮文壇」에 발표된 바 있는 「序文學者」나 그 뒤에 발표된 「어떤 求職者의 기도」등이 특히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전자는 아무 실속도 없으면서 학자연(學者然)하는 허세를 휘두르면서도 일년이 넘도록 자기 저술의 서문도 채 못쓰는 어처구니없는 위인을 풍자(諷刺)한 것이요, 후자는 어느 실직자가 천당을 전당잡힐 터이니 직장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얘기다. 역시 유모러스한 싸타이어다.

그러나 작품 「啓示」에서는 그 싸타이어가 보다 신랄한 비판의식을 수반(隨伴)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그 대상도 전기(前記)한 작품의 경우처럼 단순한 속물근성(俗物根性)이 아니라 교회안에 만연되고 있는 바리새적 세속주의이다. 즉 한국교회의 기형적인 병폐를 싸티리칼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자는 한국교회의 양상(樣相)을 몇 개의 인물을 통해서 대변시키면서, 그들의 행동을 대조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A. 교감선생…… 「자기는 교장인 선교사에게 긴히 보이려고 아첨 어떤 때는 추잡하다고 할 지경의 아첨을 하고 있고 동료의 단점도 일러바치고 있다.」
이상가 같은 작자의 설명대로 선교사에게 아첨을 하고, 그 아첨의 효과를 약화(弱化)시키는 장애가 된다면 아무나 서슴치 않고 희생시키는 간교한 타잎.

B. 고명덕…… 중학시절에 대단히 열렬한 기독학생으로 선교사의 신앙을 독차지 했었으나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던 유선생이 교감의 모략으로 쫓겨나는 것을 계기로 교회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고 신앙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험담가.

C. 김목사…… 소위 <교회의 권위자>이다. 그러나 「교권」을 최대한으로 남용하여 축재(蓄財에 광분하는 탐람(貪 )한 독직자(瀆職者).

D. 조중철 목사…… 고명덕의 동창생으로서, 청렴강직한 경건파의 전형(典型).

이렇게 네 사람의 인물이 등장한다. 여기서 A는 C와 동일부류(同一部類)라고 본다면 실은 A(C)와 B와, D, 이렇게 세가지 타잎으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대조적인 인물을 설정해 놓고, 작자는 우선 B의 입을 통하여 싸타이어를 구사(驅使)하고 있다.

「내가 자네(조중철 목사)에게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이것일세. 잘 듣게.
여보게 어느날 밤에 교회의 최고 권위자 김목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네.…… 그는 김목사를 보시고 <너는 왜 내 양을 괴롭히느냐? 너는 내 양을 먹인다고 하면서 내 양을 빌어 먹게 하고 있구나 -중략-
너는 네 교권을 옹호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마귀의 힘이라도 빌게 되면 비누나. 그 교권을 네가 장악하려고 내 말을 네 마음에 맞게 해석하여 가르치고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는 명목 밑에 네 분노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느냐 -중략-
구제물품이 나오면 교권 잡은 자들이 좋은 것들을 먼저 골라 가지고 그 다음 사람은 그 다음으로 골라 가지고 그렇게 하여 맨 마지막 사람은 헌 털멍이를 가지게 되거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중략-
너는 이 모든 일 곧 내 양을 빌어먹게 하는 일을 하면서 그 일이 탄로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 부하들을 모아놓고 밤낮 쑥덕대는 것은 어떻게 하면 바른 말하는 형제들을 말못하게 할가 하는 음모다. -중략-
이리하여 교회는 사기판이 되고 교회는 모략 도가가 되었다. -하략-」
김 목사는 아니꼽다는 듯이 예수를 쳐다보고,
「당신은 망녕이십니다. 당신은 무엇하러 나타나셨습니까? 나타나셨으면 가만히 계시지 무슨 잔소리십니까? -중략-
통 당신은 물계를 모르시고 우리를 보고하시는 말씀입니다.
교권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양심을 봉하여 둘 필요가 있고 교권을 지속하기 위하여서는 성경을 우리편에만 좋게 해설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교권이 서면 당신도 서게 되고 교권이 지속되면 당신의 교훈도 지속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부질없이 우리에게 오셔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시지 말고 저 천당 하나님 우편에 앉아만 계십시오. -하략-」
이렇게 김목사가 말을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숨을 쉬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떠나셨다네.」

물론 이것은 「카리카츄어」적인 대화의 장면이다. 그러나 그것이 「카리카츄어」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싸타이어가 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고 작자는 여기서 파괴적인 부정(否定)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본래 싸타이어의 정신은 기자(譏刺)처럼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을 교정(矯正)하고 개조(改造)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작자 임영빈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나아가서는 그것을 본연(本然)의 형태로 환기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조중철 목사를 대척적(對蹠的)으로 설정한 것도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조중철 목사를 작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는 경구(警句)도 없고 재치있는 예화(例話)도 없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그의 인격과 같이 은근하고 정중하다. 그는 누구를 더 친하게 굴지 아니하나 누구를 더 박하게 굴지도 아니한다. 그는 공평하고 광명정대하게 목회를 하고 있다.
그는 기성교회의 권위(權威)를 믿고 성경의 절대성을 믿는다. -중략-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전하는 책이요, 그리스도 신자들의 지침(指針)이니 이 책 외에 딴 책이 없다."
그는 교회와 성경에 대하여 이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복종하고 교회가 해석하는 대로의 성경을 옹호하는데는 생명까지라도 바쳐 아깝게 생각지 아니한다. -중략-
조목사는 다방 출입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더욱 교역자가 되어서 다방 출입을 하는 것은 너무도 속화(俗化)된 그 정신을 폭로시키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중략-
조목사는 잡담 농담을 대기(大忌)한다. -중략-
조목사를 나쁘게 평하는 사람들은 괴짜라 하고 좋게 평하는 사람들은 좀 과하나 그만한 목사가 있어서 혼탁하여가는 교역자의 풍속을 절제할 수 있기도 하다고 한다.

이러한 조목사도 고명덕의 말을 듣고는 「거기 반 진리라도 있는 것을 느꼈다.」고 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장에 여기 나타나시면 김목사처럼 나도 말하지 아니할가하고 생각함녀서 두렵고 우울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자기성찰(自己省察)과 반성에서 작자는 C형(型)의 타락상을 교정할 수 있는 가느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탁하여가는 고역자의 풍속을 절제할 수 있기도 하다」고 <좋게 평하는 사람>은 바로 작자자신이 아닐 수 없다.

이무튼 이 작가가 구사한 싸타이어의 목적은 바리새적인 풍속을 탄핵하면서 D형적(型的)인 신앙을 대치(代置)시키려는데 있었다고 본다. 이것은 앞서 말한대로 신앙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세속주의 혹은 바리새주의에의 비판의식이 주제가 된 대표적 작품의 하나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吳長老」란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는 흥행적인 부흥사인 오장노의 내적갈등을 분석하면서 본래의 의곡(歪曲)된 신앙에서 자기자신을 구출하는 과정을 취급한 작품으로서 사건설정의 방법은 다르지만 역시 의도만은 「계시」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웬 일인지 그는 공허감을 이길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만이 성신을 독점하고 천당을 벌써 다 갔다고 자부하던 그에게 이런 공허감이 웬 일인가? 그는 반항하고 싶었다. 그는 발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에 눌린 것같아 자기의 무능한 것을 저주하게 되었다.
「너는 교만의 화신이다!」
이 소리가 그에게 냉수를 끼어 얹듯 들려왔다. 그는 소스라쳤다.
「교만의 화신! 내 병은 이것이다!」

이리하여 오장노는 <허공을 두드린 요술작난>같은 부흥회를 철회하고 그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전개시킨다. 그것은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많이 하여라. 울리는 괭가리가 되지 말라!…… 우리는 말하기전에 행한 것을 말하여야 될 것이다. 기독교행위의 부흥! 이다.

바리새적인 위선성(僞善性)과 신앙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긍정을 환기시키려는 이 작가의 주제의식은 다시 「吳先生의 思考密林」에서는 주로 내면독배(內面獨白)의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여기서는 위선에 통하는 「탈」(가면)의 의미를 신앙생활에 결부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잠재력(潛在力)으로 은현(隱現)하는 신앙의 방편으로 전화(轉化)시키므로서 그 세속적 개념을 시정(是正)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쌔트리스트인 임영빈이 모색하는 신앙의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대강 짐작할 수 있으리라. 또한 이로서 임영빈의 다분히 풍자적인 비판이 어떠한 의미에서 제기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그러한 주제의식을 문학적인 형상을 통해서 전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논리적인 서술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소설의 미학적(美學的) 요소가 약화(弱化)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계주의 「자나깨나」의 경우

이 작품은 A항(項)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법의 질서」에 대한 이 작가의 비판만을 소개하고 지나가기로 하겠다. 따라서 이것은 검토의 각도가 다를 뿐이지 실은 A항의 「박계주의 작품」의 연장이 되는 셈이다. 다음의 인용문은 「서명환」이 「권태섭」을 향하여 하는 말이다.

「자네는 오늘까지 법에서 살아왔고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서 살려고 노력해 왔네. 결코 나는 자네를 희롱하거나 야유하거나 모멸하려는 것은 아니네만은 대체 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과거에도 자네는 금례에게 무서운 죄를 지었지만 오늘만 하더라도 자네들이 신성하다고 부르짖는 법은 한 애매한 사람을 잡아먹고 있지 않는가. 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같은 죄인이요, 불안전한 인간이 문죄하고 구형하고 재판하고 형벌 준다는 것처럼 비참한 희극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 외에 누가 사람을 심판할 수 있겠는가. -중략-
법이 신성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가 한번 다시 쳐다보이네. 법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법을 만들어 낸 인간이 신성할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신성할 수 없는 죄인들이네. 죄인이요, 불안전한 인간이 인간을 다스린다는 것은 실로 넌쎈스가 아니겠는가 -중략-
……법이라는 저속한 추물이 없어지는 날에야 인간된 그 권위와 인간 본래의 면목을 회복하게 될 것일세. 그러므로 학문 중에서도 법학처럼 피가 없는 속된 학문은 없을 것일세. -중략-그렇다면 무엇이 피가 있는 학문이며 무엇이 진리며 무엇이 인생의 목적이겠는가. 사랑이 생명의 본질이요, 진리의 전부요, 미의 극치요, 우주의 근본 원리라 한다면, 인격의 대소(大小)는 사랑의 대소에 정비례될뿐더러 우리에게서 사랑을 마이너스한다는 것은 생명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일세. 즉 인간 「제로」(零)를 의미하게 될 것일세. 「나」를 부정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 나를 포기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랑!」

이상과 같은 「서명환」의 말은 곧 작자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대변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이 작품의 중심테마이기도 하다. 즉 법의 존재이유(存在理由)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것, 그리고 만인은 다같이 불완전한 것이므로 법의 행사 자체가 일대 모순이라는 것,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비극을 상징한다는 것, 따라서 법이 존속하는 한 인간의 참된 면목은 살릴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법에 의존할 것도 아니며 의존해서도 안된다는 것. 그것은 오히려 모순과 비극을 더 조장시킬 뿐이라는 것-이리하여 법무용론(法無用論)을 내세우는 작자는 「권태섭」의 패륜(悖倫)도 그러한 법을 맹종(盲從)한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거기에 기독교적 사랑의 질서를 대결시켰던 것이다. 인간자체의 불완전성에 기인한 비극은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가의 기본적인 신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자가 이간의 궁국적인 완성을 기대할 수 없는오히려 그 불완전성과 모순만을 노정(露呈)하는 법의 효용을 비판적으로 부정한 것은 당연한 논리다. 이리하여, 「사랑의 질서」의 윤리적 우위성(優位性)과 그 종국적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법의 효용을 극도로 한정시킨 부정적 비판은 단순히 아나키즘적 반동과도 성격을 달리한다. 그대신 그것이 안이(安易)한 이상주의로 낙착(落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손창섭(孫昌涉)의 「泡沫의 意志」

매음굴에서 피어나는 신앙미담(信仰美談)이다. 항시, 습기(濕氣)찬 음지(陰地)를 배회하면서, 거기에서 인간적인 체온의 파편을 줏어 보려던 손창섭이 어쩌다가 찾아낸 이 색다른 파편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주인공은 사생아로 자란 「종배」와, 창녀  「영실」. 종배는 교회중직을 맞고 있는 이모부네 집에서 「죄악의 씨」라는 저주를 받으면서 기식(寄食)하고 있는 완전한 이방인이다. 이모네 집에서만이 아니라 어디를 가나 숙명적인 이방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변과의 인연을 단념하고 산다.

이러한 종배에게 어떤 인연의 끄나풀이 있다면 그것은 창녀 영실뿐이다.

어느날 종배는 영실을 찾아갔다. 이때 마침 가까운 교회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영실은 종소리나 찬송가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어려선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고도 했다.

「그럼 색씨두 예배당에 나가지 그래.」
「하나님이 노하실거예요.」
옥화(영실)는 가만히 한숨을 쉬고나서
「그렇지만, 죽을 땐 꼭 예배당에 가서 죽구싶어요!」

종배는 가슴이 쩌릿했다. 이모부내외가 「주여, 주여」할 때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던 종배가……. 이로부터 종배는 영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모든 희망이 거부당한 여인, 그러나 그녀에겐 영혼의 집이 있다.

그러나 여인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발이 흙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배는 묘한 의분 같은 것을 느끼었다.

「영실이, 예배당에 가요. 당장 오늘부터 예배당에 나가란 말요.」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같은 걸 누가 오래요. 저같이 더러운 똥갈보, 똥갈보, 똥갈볼……」
영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그건 영실이가 몰라서 그렇소. 어머닌 집에서 기다리실거요. 돌아가기만 하면 어머닌 잃었던 아이를 다시 찾은 듯이 기뻐하며, 흙투성이 된 손발을 깨끗이 씻어주실거요.」 -중략-
「성경에 이런 얘기가 있대요. 어떤 음흉한 사람들이 창녀라나, 아무튼 그 비숫한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구 왔대요. 그리고는 이렇게 음란하고 죄많은 여자를 돌로 치리까하고 물었대나 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신지 알아요?」
「뭐라구 하셨어요?」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는 돌을 들어 쳐라 하셨다는군요. 그랬더니, 여인을 끌구온 자들이 비실비실 피해 달아나 버리구 말았대요.」
「아, 아, 그래요, 그래요, 저두 들은 기억이 있어요.」
「그러니까, 예배당에 나가요. 이제 곧 나가요.」
「그렇지만……」
「영실이가 예배당엘 나가면, 예수님께선, 아마, 점잔을 빼고 모여든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너희들 중에 이 여자같이 나를 필요로 하는 자만 남으라. 그러면 대부분의 신도들은 슬금슬금 일어나 나가버릴 거예요. 그 때에 예수께선 친히 영실의 곁으로 다가오셔서, 나는 너를 기다렸노라. 하시며 손으로 잡고 일으켜 주실 거예요.」

이렇게 설득을 시켜 가까스로 교회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교인들은 심상찮은 시선으로 경계한다. 영실은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낀 채 뛰쳐 내려간다. 그 뒤 영실은 앓아누웠다. 금요일인데, 종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종배는 몰래 교회안으로 들어가 종을 마구 치고는 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었던 다음날 종배가 영실을 찾아갔으나 영실은 이미 죽은 뒤였다. 예배당 문 앞까지 기어가서 죽었다는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온 것을 알자 죽을 힘을 다해서 그리로 기어간 것이다. 평소의 소원대로…….

소박한 신앙이다. 그러면서도 절실하게 애필해오는 눈물겨운 순수한 신앙이다. 각자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았다. 또 그것이 소중하게 느껴진 그만큼 위선의 탈을 쓴 선남선녀(?)를 비웃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는 풍자적인 비판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서 좋을 것이다.
 
   [머리말] 성서의 우리말 번역과 그 문화사적 공헌

   [본론] 한국 현대소설에 반영된 성서의 영향

    (제1장) 성서의 기사(記事)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제2장) 성서의 정신을 주제(主題)로 한 작품들

    A.「사랑」이 주제가 된 작품들

    B.「회개」가 주제로 된 작품들

   C. 반바리새주의 정신이 주제로 된 작품들

    D. 기타

    (제3장) 성서적 진리를 의곡(歪曲)한 작품들

   [맺는말] 성서와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