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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현대소설에 미친 영향
김우규 <필자-문학 평론가>
     B.「회개」가 주제로 된 작품들
기독교적 소설이 교화적(敎化的)인 일면(一面)을 지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소설은 신앙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긍정적으로 전개시킨다는 원칙 위에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과적으로 교화적(敎化的)인 효능( 能)을 나타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 교화적인 효능이 인전된다는 것이지, 그것자체가 목적의식(目的意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교화적인 목적의식이 모티브가 되는 작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문학적인 가치로 보아 극히 저급(低級)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적 소설은 교화적인 목적의식에서가 아니라 문학적인 창조를 통해서 신탐구(神探究)의 과정을, 그리고 신앙의 리얼리티를 진지하게 전개시킨 작품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검토하려는 「회개」도 그러한 신앙적 과정의 한 양상(樣相)으로서 취급되어야 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소설은 결코 설교의 대용물(代用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참회」라든가, 「회개」라든가 하는 신앙적 과정을 취급한 작품들이 그것을 어떠한 각도에서 전개시키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전영택의 작품

전영택의 작품중에서 특히 회개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 것은 「아버지와 아들」「크리스마스 새벽」등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이 작품은 아버지와 방탕하던 아들 사이에 막혔던 증오의 담(壁)이 임종하는 어머니의 간곡한 애원(유언)을 계기로 해서 무너지면서 부자가 다시 화합된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얼굴을 돌려 딴데를 보고 잠시 말이 없다.
「여보 영감, 나는 이제 아무래도 죽을테니까 나 죽기 전에 영감이 아들을 용서해 줘서 부자가 화친을 하는 걸 보구 죽으면 한이 없겠구려. 어서 영감…… 어서 이 애야 용구야」
어머니는 한 손으로 영감의 손을 잡아 끌고, 한 손으로 아들의 손을 잡아 끌어서 갖다 대이려고 애쓴다.
「이애야 용구야」
「영감 영감」
떨리는 병자의 손은 몹시 떨리고 호흡은 아주 급해져서 금방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아버지 제가 죽일 놈이야요, 제발 용서해 주서요. 거저 죽을 죄로 잘못했어요.」
「오냐, 철없는 걸 애비가 너무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무릎에 쓸어지고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느껴운다. 앓는 어머니도 그 위에 엎드려 운다. 세 사람은 그칠 줄을 모르고 한참이나 울었다.

이리하여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아들은 또한 잃었던 아버지를 찾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작자가 말한대로 <어머니의 사랑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작자가 말하고싶은 것은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작자는 다시 그러한 사실을 통해서 신앙의 도리를 강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작자는 아들의 친구인 용구의 입을 통해서 대변시키고 있다.

「네, 제 말을 들으서요.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영 희망이 없던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사랑」을 보시고 용서하신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용서를 받고 참 사람이 디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잃었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은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용구의 아버지는 비로소 예수 믿는 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두 예수 믿겠다. 우리 다 예수 믿자」
하고 작정을 하고 용구와 영자도 예수 믿기를 결심하고 앞으로 더 좋은 아들이 되겠다고 서약을 하였다.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과 <죽으심>을 예수의 <피의 사랑>과 결부시키므로써 부자를 화친케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신앙의 도리-회개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를 강하려는데 작자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기에 설교적인 목적의식이 선행(先行)되었다는 점에서 결함을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전기(前記)한 「크리스마스 새벽」은 「아버지와 아들」보다는 사건은 전개가 훨씬 자연스럽고, 또 그만치 감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역시 설교적인 요소가 전면(前面)에 들어 났다는 점에서 동일한 결함을 보이고 있다. 우선 탈선했던 남편이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인 아내의 기도의 힘으로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이야기 자체도 그렇지만, 남편 「강」이 회개하는 심리적 과정도 역시 상식적이고, 설교적이다.

……하루는 밤인데 몇 시나 되었는지 세상이 괴괴하고 쥐 죽은 듯한데 그래두 어떻게 잠이 들었지. 글쎄 분명히 똑똑히 당신의 목소리로,
「여보, 영애 아버지」하고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단 말이지. 그래 나는 감었던 눈을 떠보니 아무 것도 안보이거던. 그런데 또 눈을 감고 있으니, 또
「여보 영애 아버지, 영애 아버지!」
하는 소리가 들린단 말이야. 그렇게 세 번을 들리더니 분명히 내 옆에 누가 우뚝 섰는데 보니까 꼭 당신이야. 그때에는 당신의 얼굴만 똑똑히 보이거던. 그런데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완연하게 보이는지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지! 고개를 숙이니까 다시 보이는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당신의 얼굴이 또 보인단 말이야. 그러자 가슴이 뭉클해지고 답답해지더니 그냥 눈물이 자꾸 나지 않겠나! 그래 자꾸 울었구만.
그런데 그 날 낮에는 하두 답답해서 나 있는 감방벽에 있는 낙서를, ……하나씩 들여다봤지. ……한 모퉁이 작으마한 글씨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한 것이 똑똑히 눈에 띄입데다. ……다시 한 모퉁이를 들여다보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고 쓴 것이 눈앞에 또렷또렷 보인단 말이야. 그전에도 보기야 보았지. 보구두 「흥 예수쟁이」하구 무심히 보았지. 그런데 그 날은 왜 그렇게 까만 글자가, 도드라지게 꼭 부각(浮刻)으로 새긴 것처럼 보이는지. -중략-
그리구 나는 그 다음에 좀 있다가 「저를 믿으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라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오. 그때엔 「멸망」이란 말은 들리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하는 말만 똑똑히 들리거던요. 그래 나는 「옳지, 살았다. 예수만 믿자」하는 마음을 먹으니깐, 속이 시원하고 가뜬 가뜬하구 기뻐서 견딜 수가 없어. -중략-

이상은 남편「강」이 아내에게 하는 고백의 일부다. 그것은 확실히 신앙미담(信仰美談)일 수는 있다. 따라서 교화적(敎化的)인 효용면(效用面)에서는 높이 평가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적인 레알리티를 그러한 각도에서만 전개시킨다면 그만치 설득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을까 한다. 더구나 사건을 그렇게 안이(安易)한 「해피·엔드」로 끌어다 붙일 때, 현대의 지성을 향해서 진정한 신앙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박계주의 「久遠의 情火」에서

방대한 스케일과 박력있는 구성으로 이조말엽의 순교사화(殉敎史話)를 취급한 「久遠의 情火」의 주인공은 예조판서 김응겸의 외딸 아심이다. 아심은 예도(藝道)에 능하고 무술까지 겸한 다기다재(多岐多才)의 소녀로서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천주교 신부의 복사 시메온 소년을 목숨을 걸고 연모하다가 거절을 당하자 배반당한 연정이 천주교도들이 모이는 소굴을 관가에 알리게 한다. 이로 인하여 천주교도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된다. 이 때 구경삼아 나갔던 아심은 사형장에서 복사 시메온이 실은 사내가 아니라 계집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심은 심각한 뉘우침 속에서 안절부절한다. 더구나 사형장에 나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신앙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그럴수록 가책은 더욱 격심해진다.

(나는 저 많은 사람들을 내 손으로 죽이고는 하루라도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못하리라. 저 착하고 진실한 사람들을 단 한 사람 죽이고도 살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저 많은 사람들을 나의 고발로 인하여 죽이게 하고 어찌 평안히 살아갈 수 있을까 보냐.)
아심은 견딜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고민했고, 후회했고, 자기의 죄를 속으로 뉘우치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그는 그렇게 뉘우치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모두 옳았던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중략-
(예수님이시여! 저는 지옥 가도 좋사오니 제 한 몸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으로 인하여 저들이 살아날 길만 있다면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중략-
사형집행 지휘관이 사형선고문을 낭독하려할 때 아심은 장옷(쓰게치마)을 벗어던지고 사형장으로 달려나가며,
「여기에도 그리스도 교인이 한 명 있으니 같이 십자가에 달아주시오.」하고, 소리 높이 웨쳤다.
아심이 참회하는 순교일화(殉敎逸話)의 감동적인 에피쓰오드의 하나, 그 이상 더 설명이 필요없으리라.

 박영준(朴榮濬)의 「赦罪」

「赦罪」- 이 작품은 오십전 때문에 삼십년 동안 가책 속에서 고민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승구. 이야기인즉 중학시절에 담임선생의 송별금을 뫃는데, 그 돈을 받던 동급생 현수가 「너 냈지?」하는 바람에 실은 안냈으면서도 그렇다고 대답해버리고는 돈 오십전을 자기가 써버린 것이 삼십년이 넘도록 마음에 걸려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회서 연보를 내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돈을 내밀 때는 꼭 돈 쥔 손을 번쩍 들었다가 놓는 습벽(習癖)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 그러다가 우연히 옛날 동급생 현수를 만나게 되어 교회로 억지로 끌고가서 지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赦罪」의 대강 줄거리다. 이 작가의 작품이 대체로 그렇듯이 여기서도 예(例)의 과장(誇張)이 실감을 감축시키고 있다.

교회당에 들어서자 승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현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자네를 만나게 해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세- 오늘 자네를 만나지 않았더면 나는 죽을 때까지 괴롬 속에 허덕여야만 했을 걸세-」
하고는 삼십년전 오십전 사건을 설명했다.
현수는 교회당이라는 것도 생각지 않고
「자아식. 난 또 뭐라구?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쓸데 없는 소리말구 빨리 나가기나 해……」
함부로 소리를 지르며 승구의 팔을 잡아 끌었다.
「정말야- 나는 그 사건 때문에 평생을 마음 조리어 살았네. 나를 그 괴롬 속에서 건져 줘. 자- 하나님 앞에서 나를 용서한다구 말 해 줘-」
그러면서 주머니 돈을 모조리 털어서 현수에게 주었다. 그리고 기어히 용서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 엎드려 기도하다.
「주여 감사합니다. 현수를 보내주시어서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마음속에 찬송가가 저절로 나왔다.
애통하는 자 복 있는 잘세
애긍을 또 얻을 사람이오.
맘 깨끗한 이는 복 있는 잘세
천부를 저가 볼 것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넌쎈tm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너무 「꾸며낸」 흔적이 들어나보여 공감이 안 간다는 말이다. 물론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는 산상보훈(山上寶訓)의 한 구절을 설교하는 데는 적절한 예화(例話)가 될 것이지만.

 이종환의 「使徒傳書」

「使徒傳書」는 사변 당시 적치하(敵治下)에서 교회를 사수(死守)는 소박한 독신가(篤信家)인 박집사와 괴뢰장교가 되어서 돌아온 그의 아들 요섭과의 사상적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어느날 박집사는 인민군 환영을 위한 교역자회의에서 「반동적인 언사」를 썼다고 부뜰려간 곳이 발 자기 아들이 앉아있는 내무서 서장실이다. 거기서 박집자와 요섭은 서로 언성을 높여 다툰다.

「여러 소리 말고 나를 죽이테냐 살릴테냐! 어서 처리를 해라!」
요섭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그 아편을 빼기까지 저는 한사코 투쟁하겠습니다.」
「오냐! 나는 너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떠나시지 않기를 기도하겠다! 그래서 네 그 머리 속의 죄악의 뿌리를 빼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 인간의 힘이 큰가, 하나님의 능력이 크신가 어디 두고 보자!」

이런 일이 있은 뒤 박집사는 교회마당에 탄약상자를 부리는 괴뢰군들을 강경히 제지하다가 총살을 당한다. 이 때 마침 집에 와 있던 요섭은 순간적인 심적전환을 일으켜 그 괴뢰군들을 한꺼번에 쏘아 죽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체를 안은채 비로소 기도를 올린다.

「하나님! 당신의 충실한 종의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오래 말랐던 요섭의 눈에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중략-

-아버지가 이기셨습니다. 아버지가 이기셨습니다. 하고 수업이 속으로 뇌이고 있었다.

박집사의 <순교의 피>가 요섭을 신앙에로 돌이킨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의 힘>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는 것을 증명해준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요섭의 전격적(電擊的)인 심적전환은 아무래로 지나친 비약이라는 결함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으로 「회개」라는 신앙적 과정의 절차를 취급한 작품들을 대강 검토해본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만한 작품의 거의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대부분의 작품이 신앙의 심적계기(心的契機)로서의 「회개」를 관념적(추상적)이거나 혹은 교화적(敎化的)인 목적의식에서밖에 처리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을 좀더 투철하게 파악했다면 「회개」의 과정을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머리말] 성서의 우리말 번역과 그 문화사적 공헌

   [본론] 한국 현대소설에 반영된 성서의 영향

    (제1장) 성서의 기사(記事)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제2장) 성서의 정신을 주제(主題)로 한 작품들

    A.「사랑」이 주제가 된 작품들

   B.「회개」가 주제로 된 작품들

    C. 반바리새주의 정신이 주제로 된 작품들

    D. 기타

    (제3장) 성서적 진리를 의곡(歪曲)한 작품들

   [맺는말] 성서와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