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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국어에 미친 영향
김윤경 <문학박사 연세대학교 문리대 교수>
    3. 성경 번역의 시작과 완성

나는 성경의 번역과 그것이 국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피어 보기 위하여 그 배경이 되는 그리스도교가 전하여 들어 온 내력을 좀 소개하려던 것이 탈선적이라 느낄만치 좀 지리하게 적은 것 같다.

이제 우리말로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함으로부터 완성되기에 이른 경로를 좀 살피어 보려한다.

신약 경경의 번역 시작은 멀리 고종 12년(서기 1875)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회 선교사 쬰 로쓰(John Ross) 목사는 봉천(奉天)에 머물면서 조선 상인들을 접촉하게 되어 조선 사람에게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나 조선 사람은 서양 사람들과 어떠한 교제도 가지기를 싫어하였다. 1873년(고종 10)에 로쓰박사는 우장(牛莊, Newchwang) 항구로부터 조선 국경(그는 “The Gate of Korea"라 하였는데 아마 의주를 가리킴이리라고 보는 곳)까지 긴 여행을 하였다. 그는 조선말을 좀 배우려고 어학 선생을 구하려 하였으나 조선 사람들의 강한 의구심은 이 뜻을 이루기 어렵게 하였다. 로쓰목사는 우장으로 돌아 갔다가 다음해(서기 1874)에 다시 와서는 한국나라와 한국사람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학 교사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얻게 되었다. 그 교사의 도움으로 로쓰목사와 동무tus고사 쬰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목사는 누가복음을 한국말로 번역하였다. 이 한국말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었다. 그는 새 신앙을 한국에 들여 왔으며 노래의 자기 이웃 사람들과 자기 형제 서경조(徐景祚)를 개종시킨 사람이었다. 서경조는 한국에서 최초로 임명된 장로 교회의 7 목사의 하나다.

고종 광무 2년(서기 1898)에 소래에 교회가 서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 첫 교회다. 번역한 누가복음을 인쇄하려고 만주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로쓰박사는 한글활자를 설계하여 일본에서 주조하였다. 식자공을 얻기 곤난하였으나 지원하는 매약 행상인 한국인을 식자공으로 고용하였다. 그는 복음을 식자하는 동안 그리스도 교의 근본적 진리를 배워서 신자가 되었다. 그 뒤 북경가는 한국의 연례(年例) 특사에 따라 가는 또 한 청년이 가입되어 숙련한 식자공이 되었다. 1882년(고종 19)에 누가복음이 인쇄되자 로쓰 목사는 매약 행상자를 종교책 행상인으로 삼아 동부 만주 골짜기에 흩어져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보내었다. 여섯달 뒤에 그는 돌아와서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다고 보고하면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함께 가자고 선교사에게 권고하였다. 로쓰는 가지 않았으나 그 행상인은 두 번째 가서 여섯 달 뒤에 돌아와서 전과 같은 용기를 북돋는 보고를 하였다. 1884년 겨울에 로쓰 목사와 그의 동무 선교사들은 만주 동북부 한국인 부락을 찾는 어려운 여행을 하였다. 네 부락을 찾아 75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더 기다리기로 한 명부를 만들었다. 세례받은 이들은 다 농부들이요, 가족의 어른들이었다. 로쓰는 이에 감동되어 새 책들을 번역함이 좋다고 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도 그 선교사들은 두 번째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사는 중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서양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자기들의 이익을 침해하련다고 오해하여 한국인 신자들을 박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불구하고 영국과 외국 성서공회는 전도를 계속하여 복음의 씨는 그 지방에 보존될 뿐 아니라 더 널리 전파되었다.

1883년에는 요한복음이 한국말로 인쇄되었다. 누가복음과 같이 요한복음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경비로 각각 삼천권씩 인쇄되었다. 이 책들을 만주에는 전파하기 그리 큰 난관이 없었으나 한국안으로 이책을 들이어 오기는 참으로 난관이 컸다. 이는 그 때 한국이 외국 서적 수입이 엄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만주 봉천에 정긱적으로 왕래하면서 관용(官用) 고지(古紙)를 무역하여 등짐군에게 지워 가는 일이 있었으므로 로쓰와 마긴타이어 두 선교사는 인쇄한 복음을 제본하지 않고 한국 상인들의 고지 뭉치속에 싸아 넣어 보내었다. 이것이 한글 복음이 한국에 들어온 최초라하여 기억할만한 일이다.

또 두 복음 인쇄의 활자는 이미 말한 대로 일본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부에서 준비하여 보낸 것이었으므로 이 복음들이 인쇄되자 전부의 삼분의 일을 일본의 대리부로 보내었다. 이는 그 나라에서 한국에 소개될 수 있도록 함이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대리자 일본 사람 신자 나가사까는 고종 20년(서기 1883) 6월에 부산에 와서 성경을 나누너 주기도 하고 팔기도 하였다. 한문과 일본말의 성경과 한국말의 복음과 종교 서적들이었다. 또 요꼬하마에 있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대표자 톰손(J. Austin Thomson)은 그의 부인과 일본 사람 신자 미우라와 스가노와 그 부인들과 함께 고종 21년(서기 1884) 4월에 부산에 왔다. 미우라와 스가노는 부산에 머물면서 그 공회의 대리자로서 성서 행상자로 활동하였다. 톰손 부부는 다음해(1885년) 6월에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하고 그 때에는 멀리 북쪽 서울까지 와서 새로 온 미국 선교사들도 만났다. 부산에 와 있던 스가노는 고종 26년(서기 1889)에 부산에서 죽고 미우라는 동시에 해고(解雇)되었다.

영국 성서공회는 1882년(고종 19)에 한국에 그 사업을 시작하여 로쓰의 신약전서 번역을 출판하기로 계획하였다. 봉천의 로쓰 목사 감독 밑에 한국에 성서를 전파하던 서상륜도 그 공회가 계속하여 일하게 하였다. 1883년(고종 20)에 영국 성서공회가 한국의 성서 사업을 넘기어 맡게 되어 북부 중국 지부의 총무 부라얀(Rev. Evan Bryant) 목사가 그 감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의 감독 밑에 로쓰의 누가, 요한 두 복음을 다시 번역하고 마태, 마가 두 복음과 사도행전을 새로 번역하여 1884년(고종 21)에 네 복음과 로쓰 번역의 사도행전을 인쇄하였다. 시약전서 번역이 완성될 때는 5천권의 출판권을 가지게 되었다. 로쓰의 번역인 “예수 셩교 젼셔”(=신약전서)는 1887년(고종 24)에 출판되었다.(그 영인본을 이제 성서공회에서 팔고 있다.) 서상륜은 고종 20년(서기 1883)에 한문 신약전서와 새로 박은 한국말 복음들을 가지고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던 때 천신만고로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서울까지 이르렀다. 그는 고종 23(서기 1886)까지 15,690권을 전파하였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온 즉시로 수 십명에게 세례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노력의 결과로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영국 선교회는 북쪽 중국과 만주와 남쪽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게 되었거니와 미국 선교회도 남쪽 일본으로부터 한국 선교에 손을 대게 되었다. 1884년(교육 21)에 미국 성서공회 총무로 일본 요꼬하마(橫濱)에 와 있던 누미쓰(Rev. Henry Loomis) 목사가 1884년(고종 21)에 한국인으로서 거기 머물던 이수정(李壽禎)을 청하여 마가복음을 한국글로 번역하게 하여 출판하였다. 이 복음은 한?미 조약이 맺어진(고정 19, 서기 1882) 뒤 처음으로 미국에서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Underwood)목사와 아펜셀러(Appenzeller)목사가(고종 22년 서기 1885) 한국으로 들어올 때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서울에서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서 도와 준 이는 서상륜이었다. 처음의 불완전한 번역이 출판된 뒤로 영국 성서공회는 한국말 성경 19,000,000권 이상을 출판하였다.

고종 24년(서기 1887)에 한국의 상설 「성경 실행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는 언더우드(H. G. Underwood)목사, 스크란톤(W. B. Scranton M. D.)의사, 아펜셀러(H. G. Appenzeller)목사, 헤론(J. W. Heron M. D.)의사, 앨른(H. N. Allen, M. D.)의사들로 구성된 것이다. 고종 32년(서기 1895)에 영국 성서공회 주재 대표 켄뮤어(Alexander Kenmure)의 제의로 성경 위원회의 조직이 개정되어 번역 사무국이 구성되었다. 지정된 번역 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셀러, 스크란톤, 트롤로프(M. N. Trollope)(나중에 한국의 감독이 된), 께일(J. S. Gale)의 다섯 사람이었다. 두 해 뒤에 레이놀쓰(Rev. W. D. Reynolds) 목사가 추가되었다. 광무(光武) 9년(서기 1899)부터 신약전서의 두어 부분이 번역되어 단행본으로 인쇄되었다. 또 요구에 따라 네 복음과 사도행전을 한 권으로 합본하여 보급시키게 되었다. 번역국에서는 구약전서 번역을 시작하여 시편을 먼저 택하였으나 그 책이 끝나기 전에 다섯 위원 중에 네 위원이 안식년이 된 때문에 거진 두 해 동안이나 정규로 모이지 못하였었다. 광무 4년(서기 1900) 여름에 신약전서 전체의 시안의 번역이 끝났다. 서울 제일 감리교 예배당(First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이를 위한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서기 1901)에 이 신약전서의 번역이 출판되었고 광무 8년(서기 1904)에 고정한 판이 나고 또 광무 10년(서기 1906)에 더 교정한 판이 나게 되었다.

광무 6년(서기 1902) 3월에 번역 위원 아펜셀러와 께일, 레이놀쓰들이 목포에서 정규 위원회로 모이게 되었는데(벨과 오웬쓰의 안식년으로 흠석되는 동안) 여름에 다시 거기서 모이기로 하였었다. 께일 목사와 그의 조수는 예정 시간대로 목포에 갔으나 아펜셀라 목사는 감리교회의 무어(David Moore) 감독을 인도하여 주느라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수일 뒤에 조수와 함께 해안에 다니는 기선을 타고 제물포(인천)에서 목포로 가게 되었다. 그 밤에 빽빽한 안개로 그 기선은 오는 배와 마주치게 되어 갑판 위에 있던 모든 승객들과 함께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성경 번역에 바친 희생이었다. 쫀쓰(Rev. G. H. Jones) 목사가 아펜셀라 목사의 후임이 되어 여섯 달 동안 일을 보았다. 다행히 이 때에 언더우드, 께일 두 위원이 그 소속 선교회로부터 번역하는 일에 전 시간을 다 쓰도록 허락되었다. 그리하여 신약전서의 수정이 두 해 동안에 끝나게 되고 광무 8년(서기 1904)에 이것이 출판되게 되었던 것이다.

번역 위원회는 이제 구약전서의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언더우드 박사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수년동안 거기서 머물지 않을 수 없이 되었고 께일 박사도 이 때 안식년으로 일을 못 보게 되었으므로 레이놀쓰 박사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한국사람 조수를 채용하였다. 광무 10년(서기 1906) 가을에 크램(Rev. W. G. Cram), 피터(Rev. A. A. Pieters) 두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선정되었으나 다른 일들 때문에 번역 사업에 많은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광무 11년(서기 1907) 봄에 영국 성서공회의 릿손 박사(Dr. Ritson)와 미국 성서공회의 팍쓰 박사(Dr. Fox)가 한국을 방문하고 성경 위원과 의논한 뒤에 레이놀쓰 박사와 두 한국인 위원 김정삼과 이승두에게 구약전서 번역을 추진하라고 허락을 주었다. 그리하여 구약전서의 첫 번 번역은 거진 전부가 이 세 사람의 일이었다. 그들은 충실히 일하여서 그 일이 시작된 지 13년 뒤 전주시에서 융희 4년(서기 1910) 4월 2일에 그 사업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서기 1911)에 구약전서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서양 사상이 흘러 들어옴으로 말미암은 말의 급격한 발달과 변화는 성경의 근본적 번역의 개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일반의 의견은 이미 개정한 신약전서보다 구약전서의 개정이 더 필요하다함이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 께일, 레이놀쓰 목사들로 구약전서 개정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레이놀쓰 목사는 이미 많은 시간을 번역 사업에 바치었고 다른 일이 많다고 사면하였다. 그리하여 몇 해 동안은 번역 사업이 간흘적으로 진행되었었다. 1917년에 스톡쓰(Rev. M. B. Stokes)와 케블(Rev. E. M. Cable) 두 목사가 추가 번역 위원으로 뽑히었으나 스톡쓰 목사는 일을 볼 수 없었다. 1920년에 엔겔(Rev. G. Engel)과 어드맨(Rev. W. C. Erdman) 두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추가되었으나 어드맨 목사는 그 다음 해에 사면하였다. 1922년에 하디(Rev. R. A. Hardie)목사와 빼아드(Rev. R. A. Baird) 목사가 뽑히었고 그 다음해에 클락(Rev. W. M. Clark) 목사가 번역 위원으로 뽑히었다. 1923년에 께일 박사가 그만두고 1924년에 클락 목사가 사퇴하였다. 1926년에 피터(Rev. A. A. Pieters) 목사와 남궁혁(南宮爀), 김인준들이 번역 위원으로 추가되었다. 이러한 위원의 시기적 변동은 번역 사업에 많이 방해를 끼치었다. 다만 레이놀쓰와 엔겔, 빼아드들로 이룬 평양 위원부가 자주 모일 수 있었다. 장질부사 병으로 인한 빼아드 박사의 죽음(1931년 11월 28일)은 평양 위원부가 일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서울 위원부까지도 원고 통과에 필요한 세 사람의 출석이 불가능하게 하였다.

피터 목사는 구약전서의 모든 남은 책들의 교정을 끝내었다. 성경 위원회는 이 책들을 검사하게 하기 위하여 구약전서 교정 위원의 한 사람으로 이원모를 임명하였다. 또 1935년부터 1936년 동안 그와 레이놀쓰 박사, 피터 목사들은 서울에서, 지리산에서, 평양에서 정규적으로 모이었다. 이 같이 하여 1936년 봄에 구약전서의 개정은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정 사업이 25년 이상에 걸치어 되었음으로 인하여 성경 위원회는 형식의 통일과 더 정확하기 위하여 이원모와 피터 위원으로 하여금 빼아드 박사가 죽기 전에 된 책들을 다시 한번 교정할 필요를 느끼었다. 그리하여 각 책을 엄밀히 읽고 필요한 수정을 더하였다. 그러한 뒤에 그 원고를 레이놀쓰 박사에게 보내어 그의 의견을 듣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을 계속하여 1937년 여름에 구약전서의 마지막 교정이 끝나게 되었다.

신약전서의 개정은 더 빨랐다. 이 일이 시작된 것은 1926년이었는데 그 때 교정 위원은 스톡쓰와 윈(Rev. S. D. Winn), 커닝함(Rev. F. W. Cunningham), 로쓰(Rev. C. Ross)들이었다. 두 해 뒤에 로쓰는 그만 두었다. 1930년에 크레인(Rev. J. C. Crane D. D.)과 남궁혁을 위원으로 더 넣게 되고 뒤에 빼아드 2세(Rev. W. M. Baird Jr.)를 더하였다. 이 위원회는 서울 혹은 평양, 여름이면 원산 해변, 혹은 지리산에 모임으로 말미암아 1937년에 끝나게 되었다.

이 전 성경의 개정 번역본은 1938년에 인쇄되어 나아오게 되었다.

여러 가지 난관(안식년, 질병, 죽음)이 있었음에 불구하고 신약전서의 첫 번 번역은 7년반에, 구약전서의 첫 번 번역은 5년 반에 완성되었다. 구약전서의 개정은 처음 번역보다 매우 오래 걸리어 거진 26년에 걸치게 되었다. 이는 처음 번역 때 경험한 곤난보다 더 심한 곤나너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신약전서의 개정도 그 처음 번역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어 거진 11년에 걸치게 되었다. 이와같이 번역과 개정에 거진 50년이나 걸리어 출판된 것이다.(1938년 5월 “The Korean Mission Field" 제 34권 제5호에 실림 신학박사 이.엠.케블 목사의 ”The Present Version"에서)

그리고 단기 4285(서기 1952)년에는 한글학회 제정의 맞춤법으로 고친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다.

동경 지진 전까지는 한국말 성경의 인쇄나 제본이 다 일본 요꼬하마에 있는 복음인쇄회사에서 맡아하게 되었었다. 서울에도 인쇄소가 있었으나 일을 맡기어 본 결과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동경 지진은 지형과 동판, 인쇄된 책들(30,725원어치)의 저장을 완전히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우리를 만족하게 하여 주던 인쇄회사까지도 파괴되어 버리었다. 영국에서 인쇄술을 공부한 그 복은 인쇄소의 젊은 주인 무라오까도 죽어서 우리의 일을 맡을 수 없이 되었으므로 비능률적이나마 서울에 있는 인쇄소에 일을 맡길 수 밖에 없이 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인쇄술도 전보다 개량되어 마침내 일본에서 하던 것에 견주어 손색이 없이 되었다. 1932년까지도 가장 좋은 가죽 의(皮衣) 제본의 일은 일본에서 하여 왔다. 그 뒤의 이 지방의 일본 사람 인쇄회사가 일본에서 그 직업을 배운 한국 사람을 고용하여 이 제본을 맡아하게 되어 매우 나은 기술을 보이어 주게 되었으므로 서울 밖의 회사에 인쇄나 제본을 맡기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1937년 6월에 런던에 있는 영국 성서공회 출판 감독자 코완(G. Cowan)은 서울에 있는 영국 성서공회 총무 민휴(閔休, Hu호 Miller)에게 “여러 나라에서 우리에게 온 책들보다 한국 사람의 인쇄와 제본의 기술이 매우 자랑할만치 낫다”고 글을 쓴 일이 있었다.

또 사복음과 사도행전, 로마서의 여섯 권이 장님(盲人)을 위하여 점자(Braille type)로 출판되고 신약전서의 나머지도 점차로 나오게 되었다.

 
   1. 서론

   2.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유래

  3. 성경 번역의 시작과 완성

   4. 성경의 전파

   5. 성경 공부

   6. 세 가지 문체의 하나인 성경식 문체를 이룸

   7.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