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정보 창고 > 성서의 활용 > 멀티미디어와 성서
한국성서운동 100년의 회고와 전망
이만열
(<남북나눔>운동 협동사무총장 겸 연구위원장)
  2. 성서공회 활동과 그 영향

성서공회의 사업은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며 반포하는 것, 크게 이 세가지였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한성서공회도 이일을 중심으로 노력하여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성서공회로 부상하였다.

성경번역사업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870-80년대부터 만주와 일본에서 시작하여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번역·출판된 성경이 먼저 보급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다. 만주에서 로스·매킨타이어를 중심으로 번역, 출판된 성경은 1887년 ≪예수셩교젼셔≫로 마무리되었다. 번역사업은, 오랜동안의 논란 끝에 매끄럽게는 안되었지만, 그 뒤 한국에 들어온 미국계의 선교사들에게 계승되었다. 1887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일찍이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 간행한 바 있는 <신약마가젼복음셔언 >를 개정하여, <마가의젼복음셔언 >로 개정, 출판하였다. 그 뒤 번역사업이 지지부진하였으나, 1900년에 신약을 번역, 출판하는 것을 계기로 활기를 띄게 되었다. 구약 또한 1910년에 번역, 1911년에 출간하게 되었다. 이것을 뒷날 개역성경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역'성경이라 한다. 그러나 구역성경은 한국어로 이루어진 최초의 성경이긴 해도 번역상의 성실을 기하지 못하여 곧 개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에 구약을, 37년에 신약을 개역하여 38년에는 합본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이 개역본은 1952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맞춰 다시 정리하였고, 56년에 판형을 정했으며, 61년에 일부 개정을 거쳐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성경이 이나마도 번역되어 출판되기까지는 한국인 신도들의 기도와 자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선교사가 입국한 지 6년이 채되지 않은 1891년에, 미국 북감리교 한국선교부는 "한국에는 번역성경을 기다리는 '울부짖는 요구(crying need)'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1897년에 간행하기 시작한 감리교·장로교의 한국어판 주간신문들은 독자의견란을 통해, 한국 신자들이 완전 번역된 성경이 보급되어지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기다리듯"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고대하듯"한다고 하였다. 초대 믿음의 조상들이 가졌던, 성경을 사모하는 심정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전통은, 과거 불교·유교가 들어왔을 때에 경전을 번역하고 읽고 외우던 한국적인 전통의 계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방 후 1960년대에 들어서서 가톨릭교회의 재일치의 기본방침에 따라 세계 성서공회연합회와 로마교황청 성서위원회 사이의 성경공동번역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국에서도 1968년 공동번역위원회가 이루어짐으로 71년에는 신약이, 77년 부활절에는 외경을 포함한 구약성경이 번역되어 《공동번역 성서》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그 후 성경번역에 고심해온 성서공회는 10여년간의 노력 끝에 1983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를 번역·간행하였으나 한국교회의 전적인 동의를 얻는 데는 실패, 다시 개정작업을 진행중에 있다.

성경의 출판은 성서공회 사업의 중요한 몫이다. 1882년 심양 '문광(文光)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한 이래 성서공회는 여러 번 거듭된 번역성경을 출판하였다. 한 판본을 완성하기 위하여 간행하는 성경은 임시역본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어야 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판본의 수는 단순히 1911년에 완료된 구역과 1938년에 완료된 개역, 그 후에 수정된 몇몇의 판본들만 출판된 것이 아니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882년에서 1945년까지만 하더라도 단편성경을 포함하여 220여종이 출판되었고, 해방후 일반출판사에서 간행한 것을 포함하면 500여종이나 된다.

성경의 출판은 한국의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경이 국한문으로 간행된 적도 있지만 대부분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는 점은 한국의 언어·문자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한글로 출판하기 위하여 자형(字形)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했고, 인쇄문화 전반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특히 우리의 말을 한글로 정착시키는 데에 성경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곧 통일된 맞춤법을 필요로 하였고 그런만큼 우리말 표기에 대한 맞춤법 연구를 끊임없이 자극, 격려하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제정의 맞춤법안이 대중화되는 데는 성경출판에서 그것을 채용하느냐의 여부에 큰 영향을 받았으므로 한글성경 출판은 우리말의 맞춤법 통일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1938년 개역성경이 출판되고 난 뒤에 조선어학회는 성경이 당시 제정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채용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성경의 맞춤법이 한글문화에 미칠 영향과 파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된 성경은 읽혀져야만 했다. 이 복된 책을 도시와 시골의 방방곡곡에 보급하고 구원의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매서(賣書) 혹은 권서(勸書)라 불렀다. 권서는 선교사나 성서공회의 감독을 받으며 성경을 반포하는 데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한국에서는 성경이 뚫고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교도소와 병원, 나환자 수용소, 매춘굴과 도박판, 아편소굴 그리고 궁궐과 가게까지도 들어갔다. 거지 소굴과 산중의 절간, 가난한 초가집과 뱃사공의 나룻배, 그리고 학교에까지 들어가 모든 곳에서 '중생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권서들이 반포하는 성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래서 성경이야말로 한국에서 복음화에 가장 두드러진 요소로 지적되었다. 초기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권서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근처에 교회가 없는 산간지방이나 외딴 지역에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경우, 권서들은 그 지역에 적당하게 모일 장소를 마련하고 모임을 인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자라서 교회로 발전했다. 모임과 교회를 추적해 보면 권서들의 사역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하는 선교사들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선교사 하디(R.A.Hardie, 河鯉泳)가 1908년 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1896년부터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남감리회는 12년간에 걸쳐 225개의 교회와 기도소를 세우고, 3,545명의 신도를 얻었는데 이것은 성서공회 권서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감사하고 있다. 권서들 중에는 뒷날 한국교회 지도자로 등장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남감리회의 경우 1924년까지 목사로 등장한 37명중 15명이 권서출신이었고, 어느 선교사가 받은 편지에는 한국교회 목회자들 중 70-80%가 성서공회 권서에서 출발하였다고 밝히고 있었다. 사실 최봉석 같은 능력있는 목사나 주남선 같은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선봉자들이 권서출신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 선교사업의 '최전방'에 서 있던 권서들은 한국 교회사에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했던 선구자들이요, 한국교회 창건자들이었다.

성경이 보급됨으로 성경공부 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모임은 바로 성경공부를 위한 모임이었다. 사경회 운동은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 교회사에서 사경회가 부흥회보다 먼저 있었고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 교회의 성격과 전통을 이해하는 한 기준이 될 뿐아니라 이 전통은 한국 교회의 앞날을 가능하게 하는 풍부한 자양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경회의 열성도 대단했다. 1901년 평양의 여성 사경회에는 300리나 떨어진 압록강변의 삭주·창성 지방의 여신도들이 참석했고, 그 이듬해의 '사나히 사경회'에 참석한 400여명 중에는 호남의 목포·무안 지방에서 참석한 남신도들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보고에는 어떤 여신도는 아이를 엎고 머리에 쌀을 인 채 300마일을 왔는데 그의 손에는 '때묻고 닳은' 성경이 쥐어져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한국 교회를 창건했던 믿음의 조상들의 자세였다.

여기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이 이야기들의 중심이 성경에 모아져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번역·출판·보급과 이같은 성경공부운동이야말로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한국교회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아니라 한국교회의 성격을 성경을 중심으로 한 교회로 형성시켜 갔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를 두고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불렀고, 한국 신자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이들'(Bible-loving Christian, Bible Lover)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기자가 초대교회의 부흥을 '하나님의 말씀의 흥왕'(행 6;7, 12;24, 19;20)으로 이해한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 출판되어 '때묻고 닳을' 정도로 읽혀진 결과,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한국사회의 개화와 근대화도 막대한 영향을 입었다. 특히 한글을 민중의 문자로 정립시키고 문자해독율을 문명국 수준으로 높인 것은 기독교의 공헌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성경의 한글번역과 그 보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독교가 한글해독(문맹퇴치)운동에 앞장 서 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과소평가되어 왔다.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은 교회마다 한글교실을 마련했고, 먼저 해독한 신자들은 선생이 되어 가르쳤으며, 권서들은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때로는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했다. 북감리회선교사 존스(G.H.Jones)가 "권서들은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책의 영광을 보게 함으로써 자기 백성들을 얽매고 있는 무지와 문맹의 사슬을 끊도록 지속적으로 영감을 불어넣는 자들이다. 현재 나의 목회를 받고 있는 1,500명의 개종자들 가운데서, 글을 읽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나마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한 것은, 1900년경의 기독신자들의 한글보급율의 정도를 잘 알게 해 준다.

성서공회가 한글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것은 일찍이 윤치호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렇든 언문을 문법대로 다시 정리하여 현재의 권위를 유지하도록 통용시킨 기관은 성서공회이라. 우리 교도는 공회에 대하여 우리의 방언으로 번역한 성서를 위하여 감사하는 것이 의례(依例)이지마는 만일에 우리가 비교인(非敎人)일뿐더러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더래도 공회에 대하여 조선의 자모(字母)를 부활시켜 유행케 한 큰 사업만을 위하여 감사하여야 될 것이다. …근자에 와서야 조선인 중에 문맹을 퇴치하는 운동이 성행하지마는 성서공회는 벌써 30년간이나 이것을 실행하였다. 현금(現今)으로 그 운동에 아무리 용력하더래도 공회에서 얻은 성공은 기대키 불능이라, 최대의 곤란은 재정이니 이 운동에 대하여 일년에 10만원을 쓰려는 조선인의 기관이 어디 있느뇨. 공회에서는 이같은 거액을 매년에 비용하나니 우리는 공회가 조선인 중에서 문맹퇴치의 운동을 장구히 유력하게 진행할 줄 에언한다" 1920년대 후반, 윤치호의 이같은 지적은 한글이 창제된 이래 400여년간 감추어졌는데 그것을 끄집어내어 갈고 닦고 문법을 정리하고 또 30여년간 매년 거대한 금액을 들여 민중의 문자로 부활시키기 위한 문맹퇴치운동을 벌여온 것이 성서공회라는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1. 대한성서공회의 창립과 성장

   2. 성서공회 활동과 그 영향

   3. 성서공회의 전망과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