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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서운동 100년의 회고와 전망
이만열
(<남북나눔>운동 협동사무총장 겸 연구위원장)
  1. 대한성서공회의 창립과 성장
대한성서공회가 올해를 창립 100주년으로 삼는 것은, 그 모체의 역할을 감당했던 영국성서공회의 켄뮤어(Alexander Kenmure, 1856-1910)가 독립된 한국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한국의 임시 총무 자격으로 중국을 떠나 한국에 도착한 것이 1895년 10월 18일이었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에 앞서 켄뮤어는 그가 중국 남부지부 총무로 있던 1887년부터 한국의 성경사업에 뛰어들었고, 그 뒤 1893년 5월에는 서울에 와서 선교사들과 성경사업을 상의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영국성서공회 본부가 독립된 한국지부 설립을 의결하는 것은 1896년이다.

외국성서공회들의 한국인을 위한 성경사업은 이보다 훨씬 전에 만주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870년대에 들어 만주의 영구·우장·봉천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Macintyre, 馬勤泰)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 보급하기로 하고, 1877년경부터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한편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1879년에는 몇 개의 복음서가 번역됨과 동시에 4사람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는 '기적'이 만주에서 일어났다. 이 기적은 1882년에는 3월에 누가복음이, 5월에는 요한복음이 번역, 출판되고, 또 두 사람의 한국인(김청송·서상윤)이 세례받는 열매로 연결되었다. 이 때 출판된 누가·요한복음은, 일부가 일본의 스코틀랜드 지부로 들어가 83년경부터는 부산과 대구에서 한국인들에게 보급되었고, 만주와 압록강변, 한국에 보급되면서는 복음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오기(1885년 4월 5일) 전에 수많은 수세희망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에 들어왔던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역할에 의한 것이다.

한편 임오군란에서 민비를 살리는 데에 공헌한 이수정은 1882년 10월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으나 일본인 쯔다(津田仙)의 인도로 그 이듬해 4월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 때부터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의 루미스(H.Loomis)의 도움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 1884년 말에는 한문성경인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이두식 토를 달아 한한(漢韓)성경으로 출판하였고, 1885년 초에는 마가복음을 번역, 출판하였다. 이 성경은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 서울로 들어올 때 갖고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최초의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이 그 지방의 언어로 번역·출판된 것은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같이 먼저 해외에서 한국어 성경번역에 힘쓰던 성서공회들은 한국에 권서들을 파견하여 성경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안에 그들의 지부를 설치하였다. 이미 1882년부터 만주에서 출간된 성경을 한·만국경지역과 한반도에 반포하기 시작한 영국성서공회는 1893년에 한국·만주 지역을 관장하는 부총무로 임명된 털리(R.T.Turley)를 서울에 파견, 성경보급소를 개설토록 하였고, 95년 10월에는 켄뮤어를 보내어 정식으로 한국지부를 조직하도록 했다. 미국성서공회는 1889년에 올린저(F.Ohlinger)를 한국 부총무로 임명, 주로 선교사를 통하여 지부활동을 계속하게 되었고, 95년에는 피터즈(A.A.Pieters)를 권서로 임명, 한국에 성경을 반포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는 독자적인 지부를 설치하지 않고 영국성서공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 간접적으로 한국성경사업에 참여하였다.

처음에 각 공회는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20세기초의 한국의 성경사업은 번역·출판·반포 등에서 협조해야 할 일이 많았으나 실제적으로는 경쟁관계에 있었다. 일·러전쟁의 전개와 선교활동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심한 통제 등은 선교부들과 성서공회들이 단결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1904년 한국성서위원회가 구성되고 연합총무에 켄뮤어가 임명되는 것을 계기로 1907년까지 3공회들의 사업상의 불일치로 1908년 연합사업은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특히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 문제는 한국에 있는 지부가 해결해야 하기보다는 런던과 뉴욕의 본부에서 나서야 할 문제였다. 런던과 뉴욕은 필리핀과 한국의 사업을 고려하여, 필리핀에서 영국성서공회가 물러나고 한국에서 미국성서공회가 물러나는 것으로 조정하였다. 따라서 1919년부터 한국의 성경사업은 영국성서공회의 독점적인 관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만주사변(1931년)과 일중전쟁(1937년)을 일으켜 극동지배를 노골화하던 일본은 1941년에는 구미 제국과의 전쟁을 일으켰다. 식민지 조선에서 그들은 전시체제를 강화하였다. 한국인에게 '황국신민화정책'이라는 민족말살정책을 자행하던 일제는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과 외국기관들에 대해서 간섭하면서, 1942년경에는 선교사를 모두 추방하였다. 그에 앞서 일제는 대영성서공회 한국지부에 대하여 1938년경부터 '조선성서공회'로 개칭할 것과 외국의 도움없이 운영하도록 명령하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명칭을 변경하고 임원들을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바꾼 성서공회는 영국인 총무 홉스(Thomas Hobbs, 許曄)가 추방당하자 사실상 사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성서공회 사업은 해방을 기다려야만 했다.

오늘의 대한성서공회는 해방 후 한국교회의 재건사업과 함께 진행, 장족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꾸준히 연합됨을 유지,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요, 따라서 성서공회는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상징성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교파와 교단에 따라 찬송가 등은 달리 사용한 때는 있었으나, 아직 강단용 성경을 달리한 적이 없다는 것은 이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1. 대한성서공회의 창립과 성장

   2. 성서공회 활동과 그 영향

   3. 성서공회의 전망과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