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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와 교회 변혁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Ⅱ. 인쇄 매체와 종교개혁

월터 옹(W. Ong)과 마샬 맥루언(M. McLuhan)의 획기적인 업적을 근거로 의사전달 매체의 변천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토마스 부머샤인(Th. Boomershine)의 말대로, 인류는 의사전달의 구전시대로부터 필사시대, 음성과 인쇄가 병행하던 시대, 음성이 사라지고 인쇄가 주도적인 시대, 그리고 오늘날의 전자시대로 변천해 왔다. 이와 더불어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이를 받아들이는 신학적 해석의 틀 역시 변화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여기에서는 그 가운데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인쇄 미디어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서로 다른 입장을 보다 자세히 분석해 봄으로써 오늘날의 새로운 매체인 멀티미디어에 대한 보다 정당한 신학적 이해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전망해 보고자 한다.

미시건 대학교의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아인슈타인(E. L. Einstein)에 의하면, 1517년부터 1520년 사이 약 3년 어간에 마르틴루터의 저작 30권이 30만부 정도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간단한 자료를 보아서도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인쇄에 의한 출판행위가 얼마나 밀접히 관계되어 있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위클리프나 발도주의자들과는 달리 루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인쇄물(printed book)의 아들이었던 셈이다. 루터는 인쇄라는 의사전달 수단을 통해서 유럽인들의 마음에 정확하고 표준화된,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심어 놓을 수 있었다. 루터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쇄물을 통해서 엄청난 대중 독자층(a great reading public)을 확보했고, 이로써 자신의 혁명적 사상의 가치를 강력히 제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간 르네상스나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이와같은 의사전달 수단으로서의 인쇄매체가 가져다 준 의미나 충격이 소홀히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홀본(Louise Holborn)이 자신의 저서 <인쇄>에서 규정하고 있듯이, "종교개혁은 인쇄출판의 도움을 받은 최초의 종교운동"이었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터어키인들과 싸우는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인쇄업자들을 소집한 바는 있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처럼 '뉴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교황제도에 대항할 때, 글 뿐만 아니라 만화까지 인쇄하여 출판할 정도였다. 그 영향력은 지극히 자극적이었기 때문에, 루터는 16세기 독자들로부터 깊은 열정과 관심을 자아낼 수 있었다.

루터가 이처럼 과감하게 인쇄매체를 이용하게 됨에는 그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쇄란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은총 행위"이며, "세상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불꽃"이기 때문에, "이로써 복음사역을 전진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그에게 가득차 있었다. 인쇄 미디어에 대한 이같은 루터의 신념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지상 인간의 미래를 무한정적으로 확장될 것으로 본 것과는 달리, 루터는 역사의 전진 운동이란 심판의 날에 곧 도달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사상에 의해서 지배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인문주의자들에게 인쇄매체는 단지 전진적인 계몽을 위한 소극적인 수단일 뿐이었다.

한 편, 당시 독일인들에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즉 획기적인 활판인쇄술의 발명은 로마 가톨릭의 구속으로부터 독일을 해방시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참된 종교의 빛을 가져다 준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루터가 인쇄물을 통해서 교황청을 향하여 신랄한 공격을 퍼부음으로써 더욱 확고해 질 수 있었다.

인쇄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인식과 더불어, 인쇄는 신의 뜻에 의한 도구라는 생각이 더해짐으로써 인쇄매체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자세는 적극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중세에는 학문이 성직자들에 의하여 독점되다시피 했었는데, 그것은 기록된 문헌자료의 부족현상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박사"로 알려진 성 테레사 조차도 자신의 성서를 갖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로써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어쨌든 인쇄로 인하여 많은 문헌이 대량으로 나옴으로써 성직자들에 의하여 독점된 학문은 미신이 타파될 수 있었고, 교황에 의한 세력의 악마성을 드러냄으로써 더욱 강력히 저항하여 물리칠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서구 유럽을 암흑시대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을 인쇄 미디어가 감당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인쇄물의 영향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을 소개해야 할 것이다. 비텐베르크 성곽교회(SchloBkirche) 정문에 붙였다고 알려진 95개 조항 반박문은 모든 비텐베르크 시민들이나 전 독일국민에게 보이려고 했던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당시의 학자들간에 있었던 하나의 관례로서 특정 주제에 대하여 자신과 다름 입장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토론모임을 가져보자는 제안 행위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학교수로서 루터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학문적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어로 쓰지 않고 라틴어로 썼던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하나의 신비스러운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라틴어로 쓰여진, 그리고 학문적 논쟁을 위한 제안문이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그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국경을 넘어서까지도 그 내용이 전달될 수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먼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반박문이 인쇄 배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의 1517년 12월에 거의 동시적으로 Nurenberg, Leipzig, Basel 세 곳에서 출판되어, 당시 라틴어를 아는 평신도 엘리트들에 의해서 읽혀졌다. 이들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 워크숖(workshop)에 모여 토론하였으며, 번역하고, 책 행상인들은 이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판매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1917년 10월 31일이 "중세교회의 종말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당에 붙인 반박문 종이 한 장으로써는 가능할 수 없었던 일임을 알 수 있다. 루터가 취했던 전통적 방식의 신학논쟁이 이루어지지 않은 대신, 뜻밖에도 인쇄 미디어를 통해서 전적으로 새로이 나타난 대중적인 신학토론은 전 유럽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논박문은 하룻밤 사이에 독일 전 지역에 알려졌고, 한 달만에 전 유럽에 전달되었다. 인쇄는 새로이 등장한 힘으로 인식되었고, 광고(publicity)는 본궤도에 올랐다. 위클리프에게는 대필가(copist)들이 있었지만, 루터에게는 인쇄출판업자들이 있었다. 인쇄는 의사전달 영역을 뒤바꾸어 놓았고, 국제적인 긴장을 야기시켰다. 그것은 한 마디로 혁명이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인쇄 미디어는 무엇보다도 교황제도에 대한 저항 행위를 가속화시킬 수 있었고, 정통으로 받아들여진 신조와 예배 형식 및 기구를 변혁시키는 매체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다른 한 편, 15세기 경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인쇄 자체를 반대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열렬히 환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터어키를 침략키 위한 십자군 후원 및 자체적인 목적을 위해 인쇄라는 뉴미디어를 활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새로 등장하는 전자 매체들을 자체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현상과 다를 바 없다. 루터 뿐만 아니라 교황 자신까지도 인쇄는 신이 주신 은총 중에서 최고의 것이며, "신이 만든 예술작품/기술"(divine art0이라 할 정도였던 것이다. 일반 성직자들은 책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인쇄를 환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라틴어 성서를 자국어 번역본으로 인쇄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히 제한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취했다. 레오 10세는 라테란 공의회 칙령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아라비아 성서로부터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과, 라틴어를 자국어인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하는 것에 대하여 철저한 통제와 검열을 실시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러한 번역본들이 신자들의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하여 잘못된 내용을 제시할 수 있거나, 실제로 잘못된 곳으로 빠진 경우가 나타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국어 성서번역에 대한 통제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루터의 팜플렛들(tracts)을 집중적으로 검열하였다. 이것은 반종교개혁 운동 과정 중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1559년 바울로 4세의 교황 칙령에는 초기의 금지 조항이 되풀이되어 있고, 1564년 피우스 4세의 칙령에서 처음 공포된 10개항 일반규율에는 성서인쇄 뿐만 아니라 성서읽기까지도 검열의 한 조항으로 나와 있었다.

이와같은 가톨릭 교회 당국의 정책과는 달리 개신교회는 자국어 성서 번역 뿐만 아니라, 경건 서적 및 교리문답서 등을 인쇄 배포하였다. 로마와 관계를 끊은 모든 영주들은 성서번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그 결과 개신교 지역의 문화는 인쇄출판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같은 흐름이 강화되면서 중세 내내 사용되어 온 벌게이트(Vulgate) 성서는 마침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투쟁적 개신교 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바로 인쇄문화가 가져온 혁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영국에서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하는 토마스 모어와 루터의 입장을 따르는 틴데일이 1527년부터 1532년 사이에 행한 성서에 대한 논쟁을 살펴 볼 때, 양측의 차이는 보다 분명히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모어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진리를 복된 입으로 전했지 문자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문자 없이도 그의 메시지는 인간의 마음에 새겨졌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비문자적 전통에 서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성서를 번역하고 인쇄 배포하려는 개신교의 시도를 비판하였다.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의 진리를 오랜 기간 동안 비문자적으로 전했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했지 성경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친다. 글이란 신학적 문제를 해결해 주기보다는 더욱 혼란케 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책이 아닌 성령의 거주하심을 통하여 진리를 알리시기를 의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틴데일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뿐만 아니라, 성서에 신비적이고도 현묘한 능력까지 부여한다. 성서를 정독하게 되면 진리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독재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성서는 독재와 거짓 가르침을 폭로해 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논의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뉴미디어는 수용하는 자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그 고유한 역할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통을 수호하고 자신의 기존 질서를 강화시키는 한에서만 사용하는 도구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이 될 때, 그것은 무질서를 일으키며 전통과 권위를 파괴하는 위협적인 무기로 인식하였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인쇄" 미디어로부터 개방성, 명확성, 개별 신앙의 존엄성을 가능케 해 주는 메시지를 읽어 내었다. 그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뉴미디어가 지닌 적극적인 가능성을 교회의 변혁을 위하여 최대한도로 활용하였다. 즉, 로마 가톨릭의 제도적 권위주의와 성직계급 우월주의, 배타주의의 장벽을 허무는데 인쇄의 기술은 적시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이해될 수 있었다.

 
   Ⅰ. 들어가는 말

   Ⅱ. 인쇄 매체와 종교개혁

   Ⅲ. 대화적 의사전달 환경을 향한 교회의 변혁

   Ⅳ. “문자 이후 시대의 인간”이해와 교회의 변혁

   Ⅴ. 맺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