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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신문에 미친 영향
최준 <홍익대학 신문학과 교수>
    4. 프로테스탄트와 신문

카톨릭은 한국의 선교방식에 있어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를테면 신부(神父)들이 한국의 조정(朝廷) 즉 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지도 않고 들어와서 전도하였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물론 정면으로 조정과 교섭하여 전도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당시의 한국의 움직임으로 미루어보아 거의 불가능에 속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하려는 열성의 나머지 비합법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카톨릭의 비합법적인 전도 방법은 결국 한국 역대 조정의 비위를 더욱 상하게 하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천주교도의 일대 학살사건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카톨릭의 이러한 적극적인 전도 방책은 비록 지나치게 가혹한 한국 조정의 탄압정책으로 그 보복을 받았으나 그러나 이에 굴함이 없이 카톨릭의 씨는 한국 인민 속에 깊게 뿌리를 박았으니 이것은 특기할만한 역사적인 사실이라 보겠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문서를 통한 전도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에 비하여 뒤졌다는 사실이다. 카돌릭 역시 문서운동을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1864년 「성찰기략(省察記略)」과 같은 한글로 된 종교서적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문서가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와 같이 조직적이요 활동성 있는 것은 못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카톨릭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한걸음 뒤졌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는 한글로 된 성경을 들고 한국에 들어 왔을뿐더러 다시 인쇄시설을 마련한 후 신문까지 발행하게 되었다.

감리회의 선교사 아펜셀라는 배재학당 안에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그는 1889年 1월 4일 청국에서 선규하고 있던 올린거(Dr. Olinger)를 초빙하여 인쇄소의 책임을 맡긴 후 이 운영을 부탁하였다. 이것은 일명 미이미(美以美)활판소라 일컫는 것으로서 기독교 문서 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한 곳이었다.

아펜셀라는 이 시설을 이용하여 이미 1897년 2월 2일부터 죠션 크리스도인 회보(Korean Christian Advocate)를 창간하였다. 이것은 순 국문으로 된 주간 신문이었다. 2페이지 2단제의 신문으로 첫 페이지에는 사설젹인 총설(總說)을 실었으며, 다음 페이지에는 내보(內報)로서 정치, 사회에 관한 일반 기사를 실었다. 이제 「조선 크리스도인 회보」 창간호에 나타난 찬강사(創刊)를 볼 것 같으면 『죠션 회보라 ㅎㆍㄴ 발명함이라』 제목하여 다음과 같이 그 뜻을 밝혔다.



이리하여 동보는 바깥세상을 내다보게 하였고 보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개명하여 새지식을 얻는데 힘썼다. 동보는 그후 「대한그리스도인회보」라 개제하였고 1900년에 들어서자 지면을 6페이지로 늘렀다. 첫째 페이지에는 역시 총설란이 있고, 둘째 페이지 셋째 페이지에 걸쳐서는 교회소식과 매주일에 공부하는 구약·신약성경의 이야기를 실었다. 다시 셋째 페이지 하단으로부터 넷째 페이지에 걸쳐서는 개화문명에 관한 상식 이야기를 소개하였고 다섯째 페이지에는 한제국 정부의 법령를 비롯하여 정계의 동태를 보도하였다. 마지막 여섯째 페이지에는 교회 청년회의 소식을 전하였다. 이리하여 종교신문이면서도 당당히 일반 신문의 형태를 갖추어서 당시의 기독교신도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대중을 상대로 한 편집 방침을 취하여 「조선 크리스도인히보」는 일반에게 커다란 관심과 흥미를 끌게 하였다.

한편 장로회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도 1897년 4월 1일부터 「크리스도 신문」 The Christian News을 「조선 크리스도인회보」와 마찬가지 체재로 8페이지 제도의 주간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신문」의 창간사를 볼 것 같으면

『조선 백성을 위하여 지식을 널리 펴려하는 것이니 지식 말하려 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의 이치와 형상과 법을 아는 것이오, 타국 백성의 사는 풍속을 아는 것이오, 모든 물건을 만드는 법을 아는 것이라. 아무 생업이라도 각 의문을 배우는 것이 유익지 아님이 없으니 지식이라 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자유로 유익하게 함이니 나라에도 유익함이 된다.………』

하여 동보는 한국 인민들의 지식을 넓히는데 주력하였다. 이제 「그리스도 신문」의 지면 구성을 살펴보면 제一면은 「논설란」으로 하여 각종 논설을 실었고 제二면에는 「농리편설란」이라 하여 농민에 관한 지도 기사를 많이 소개하였다. 三면에는 「공장 편리설란」이라 하여 쇠고기 말리는 법을 비롯하여 종이로 옷 만드는 것등의 과학·계몽기사를 실었다. 四면에는 기독교에 관한 논설 등으로 채웠으며 五면에는 관보, 그리고 六면에는 역시 성경 강론회 대관을 비롯하여 교회통신, 七면에는 기도회에 관한 소식을 실어 종교신문답게 그 지면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인 八면에는 다시 외국통신을 비롯하여 국내의 소식 즉 각부(各部)의 통신, 각 지방의 소식을 보도하였다. 이로서 「그리스도신문」의 편집 내용을 엿볼 수 있듯이 농업, 공업 등에 걸친 지도기사가 많이 실린 대신 정치, 논설이 빈약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외국인 주재의 그것은 특히 종교 신문으로서는 피치 못할 것으로 이를 탓할 것이 못된다. 그 보다도 편집 기술의 능란하고 다채로운 점은 당시 한국의 민간신문이 따라가지 못할만큼 뚜렷하였다는 것을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신문」의 집필(執筆) 진영을 볼 것 같으면 거의가 당시 한성에 주재중이던 외국인들로서 이를 한인들이 번역하여 발표하였던 것이니 언더우드 목사를 비롯하여 빈톤(C.C. Vinton), 씰(J. M. B. Sill) 미국공사, 알렌, 헛치슨(Hutchson), 뻥커(D. H. Bunker), 에비슨(C.D.Eveson), 견묘 등이었다. 그중 씰공사는 농사에 관한 전문적인 것을 발표하였으니 그는 미국에서도 이 방면에 이름이 높았던 만큼 당시 과학지식의 수준이 낮은 한국에 있어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다만 이러한 논문과 기사를 국문으로 옮겨 놓는데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인재부족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신문」은 편집 방면에서만 뚜렷한 것이 아니라 영업 방면에서도 새로운 길을 터놓아 한국 민간신문계에 커다란 자극을 던져 주었다. 그것은 당시의 한제국의 임금인 고종(高宗)의 사진과 종교 관계의 사진을 부록(附錄)으로 발행하여 신문대금 1개년분을 전납한 독자에게 무료로 돌려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독자를 15명(신문대금 전납한자)을 모집한 사람에게는 재봉틀 한 대를 선사하는 등의 적극적인 영업정책을 썼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한국 신문계에 대하여 부록의 발행과 경품권(景品券)발행의 좋은 선례(先例)를 마련해 주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이룩하였다.

이상 프로테스탄트의 두 종교신문은 당시 한제국 농상공부(農商工部)의 인가를 얻어 발행된 것으로서 합법적인 발행물이었다. 미국 프로테스탄트 계통의 두 신문의 출현은 한국 인민에게 커다란 주목과 자극을 던져 주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제국에 진출을 꾀하고 있던 일본 기독교계에도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일본의 조합교회 전도국에서는 미국계의 선교사업에 대항하여 한제국 선교에 손을 뻗혀 한성 명동(明洞)에 경성학당(京城學堂)을 설치하였고, 또 광무협회(光武協會)를 조직하였다.

이 광무협회에서는 1898년 4월 10일 국문판의 「대한신보」를 창간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와 「그리스도 신문」에 대항하였다.

이상과 같이 프로테스탄트는 한국에 있어서 신문발행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비롯한 각종 종교서적을 많이 내어 당시 아직도 매스·메디아가 충분히 발달되지 못한 때에 한국의 컴뮤니케이슌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군국 일본의 통감정치가 등장되자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감시는 점차로 전기 두 신문은 사라지고 말게 하였다.

이리하여 새로 나타난 것이 1910년 2월 「예수교회보」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계속되지 않았고 그후 다시 1916년 1월에 「기독신보(基督申報)」의 등장을 보게 되었다. 즉 이것이야말로 전일의 「대한그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의 합동체인 프로테스탄트의 신문이었다.

이 때는 조선총독 아래 무단정책(武斷政策)이 강행되던 무렵이었다. 한국인의 일체 민간신문의 발행을 허락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기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는 선교사 기의남(奇義男)의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전일과 같은 시사성(時事性)있는 뉴우스는 일절 실리지 않고 순전히 교계(敎界) 신문으로 되고 말았다. 그 후 「기독신보」는 장로회와 감리회에서 각각 이사(理事)를 낸 후 예수교서회에서 발행되었으나 1934년경 채필근(蔡弼近)이 사장이 되었고, 이어 전필순(全弼淳)이 사장이 되어 그 운영권은 선교사의 손으로부터 완전히 한인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1931년경 장로회 종교 교육부에서는 따로 「종교신보」라는 잡지 형식의 기관지를 발행하였고 감리회에서도 1933년에 새로 「감리회보」를 잡지 형식으로 발행하여 전기 「기독신보」는 장·감 연합체적인 성격과 조직체가 뭉그러졌다.

그 후 「종교시보」는 주간 신문의 형식을 갖추어 「기독교보」라 개제한 후 1936년에 장로회 총회의 정식 승인을 얻어 등장하자, 전필순의 「기독신보」와 경쟁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 후 군국 일본의 적극적인 만주진출과 더불어 한국의 정세도 날이 갈수록 험악하여 갔고 1938년 8월에는 마침내 「기독신보」는 재정난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이 때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장홍범(張弘範)등의 노력으로 종래의 「기독교보」를 신문지법(新聞紙)에 의한 「기독신문」으로 만들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게 되었다. 이때 사장으로서는 김우현(金禹鉉)이 취임하여 조선총독 정치 아래의 유일한 프로테스탄트의 신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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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프로테스탄트와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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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자주 독립 사상의 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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