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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한국 신문에 미친 영향
최준 <홍익대학 신문학과 교수>
    3. 문서운동에 성공한 프로테스탄트

그러면 이처럼 기독교가 한국에 있어서 국민 대중 속에 그 뿌리를 박게 한 것은 무엇이냐? 한 말로 표현하여 문서를 통한 활발한 컴뮤니케이슌을 들어야 되겠다. 물론 선교라는 것은 구술(口述)을 통한 전도를 젖혀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프로테트탄트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 한국내의 형편은 구술을 통한 전도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어째서냐 하면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가 바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간 즉후이었기 때문이었다.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이야말로 한국의 근대화(近代化)를 꾀한 획기적인 정치적 일대 변혁이었다. 오랜 동안 쇄국정책을 고집해 내려온 보수 사대파(保守事大派)-이것은 전제군주(專制君主)를 에워싼 집권세력(執權勢力)으로서 그 지반은 확고부동한 것이었으니 이들의 세력을 넘겨 뜨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 보수 사대파가 내세우는 것은 척양척일(斥洋斥日)의 배타적인 쇄국주의이었다. 쇄국주의가 앞장으로 내세우고 나온 것은 서학(西學)의 반대이었다.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로 카돌릭에 관한 서적이 중국으로부터 일부 실학파(實學派)의 우리 학자의 손으로 받아들였을 때 발벗고 나서서 이를 반대한 것이 이들 보수 사대파이었다. 이들은 서학을 사학(邪學)이라 규정하고 전제군주를 꾀어 일부 실학파의 학자를 박해하였다. 당시의 보수 사대파의 지도적 세력체는 물론 전제군주에 접근한 궁정(宮廷) 관료와 유림(儒林)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절대군주주의 시대에 있어서 압도적인 세력체로서 전자는 정권(政權)을 잡았고 후자는 학적인 패권을 쥐었다. 따라서 이들 보수사대파의 반대는 곧 그들이 받들고 있던 전제군주의 의사(意思)가 되었다. 이들이 반대하고 배격한 서학-다시 말하면 카돌릭과 프로테스탄트는 한국의 전통에 위배될 뿐만이 아니라 유교의 사상에 어긋난다는데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상경향은 쇄국주의자들이 항용 손쉽게 떨어지는 하나의 함정이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그것은 결사적인 것이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로서 일본에 건너갔던 김홍집(金弘集)은 동경 주재의 청국(淸國)공관의 참찬관(參贊官)인 황준헌(黃遵憲)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때 두 사람은 한국의 자강책(自强策)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황준헌은 한국이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하여서는 청국을 비롯한 일본, 미국 등과 손을 맞잡고 나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라사의 침략을 받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이란 한 책자를 김홍집에게 주었다. 귀국한 김홍집은 당시의 임금인 고종(高宗)에게 이 책자를 올렸다. 이 사실을 안 궁정관료와 유림들은 이것을 맹렬히 반대하였고 김홍집을 비난하여 그를 정배(定配)하도록 상소(上疏)를 올렸다. 이것은 이른바 척사론(斥邪論)으로서 신사위정척사론(辛巳衛正斥邪論)이었다.

조선책략은 하나의 외교적인 의견서이며 이를 헌의한 황준헌은 청국의 서구(西歐)사정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의견은 한국이 아직 구미의 여러 나라와 외교적인 조약을 맺지 않고 쇄곡정책을 쓰고 있으나 이들과 평화적으로 국교를 맺는 것이 한국을 위해 이익이 될 것이라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개국정책(開國政策)을 권유한 것이었다. 이때는 아직 한국이 미국과도 아무 외교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던 때이었다.

한편 유림들이 이를 반대하는 이유로서는 위정척사는 역대 임금의 하나의 국시(國是)로 되어 내려왔다. 그런데 청국,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아라사를 막으라든가 서학을 받아들여 농사를 권장하며 나라를 부강케 하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요망스러운 말이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일찍부터 내려오는 농, 상, 공에 대한 좋은 법규가 있는데 무슨 까닭에 서학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림들의 척사론은 비단 이때만의 것이 아니었고 그 이전부터 뿌리깊게 계속하여 꼬리를 물고 내려왔던 것이었다. 이 척사론은 당시 한국의 세력체인 상층계급에서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보수 사대파의 세력을 거꾸러뜨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부 혁신주의자들간에는 어느때까지 이러한 보수 사대주의자들의 쇄국정책을 따를 수는 없었다. 여기에 분연히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일부 혁신주의자들로 꾸며진 갑신정변이란 하나의 정치적 쿠데타이엇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등 30대 전후의 젊은 혁신주의자들은 마침내 비상수단으로서 보수 사대주의자들을 거꾸러뜨리고 정권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나 혁신주의자들의 쿠데타도 3일만에 다시 보수 사대주의자들의 반격을 받아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때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들어왔으니 전도사업을 정식으로 할 수 없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구두로 전도하는 일을 극력 삼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프로테스탄트가 문서(文書)를 통하여 전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이때 사정을 말하는 것으로서는 당시 한국에 있었던 쪼오지?낄모어(G. Gilmore)는 그의 저서인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미국 영사한테 선교사업을 중지하라는 요청을 한 두 번 해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국왕은 선교사들이 오는 목적이 무엇이며 그들이 그 목적을 수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영사에 대한 이와 같은 요청은 정치적인 흥분의 시기에 해지는 것을 주의하여야 한다. 이 요청은 전도활동이 선교사와 신도에게 다같이 위험하여 정부에 반대하는 폭동에 이바지할 위험성이 있을 대에 해진다. 그러므로 정부는 선교활동의 박해를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전도할 목적으로 민중들에게 적극으로 덤비지 않는다. 전도사업은 위선 책을 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한문성경(漢文聖經)을 서울의 선교사들이 개편한 마가복음, 그밖에 소책자와 번역서들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렇듯 당시 선교사들은 프로테스탄트를 전도하는데 있어서 먼저 문서를 통하여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우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내부적으로 구술 즉 이야기를 통하여 전도하였고 한편으로는 성경을 팔러 다니는 성경판매인 이것을 그후 권서(勸書)라 하였는데 이들 권서를 통하여 성경을 한국인민에게 전파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는 조심성있게 문서를 통한 전도에 몰두하였다. 그것은 한국의 법을 범하지 않으려는 데 하나의 이유가 있었고 또 카돌릭과 같이 한국의 국법을 위배하면서까지 전도함으로서 박해받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갑신정변 즉후이라 보수 사대파가 세력을 잡고 있을 때 구술저도로 적극 진출한다는 것은 오히려 앞날에 지장을 가져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신중한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들은 이 성경 판매하는 것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혹을 가졌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육과 의료사업을 하겠다고 한국정부와 약조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약조에 충실하자면 권서를 내세워 성경을 판다는 것은 물론 일체의 전도를 할 수가 없었기 까닭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성경읽기를 권한다는 것은 각자 개인의 양심을 맡길 일이므로 이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은 그들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들은 성경 판매를 계속하였다. 이로서 한국의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을 통한 말하자면 문서를 통한 선교사업이 시작된 것으로서 이것이 프로테스탄트와 자체의 성장발전을 적극 도왔을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컴뮤니케이슌을 활발히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도화선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실로 한국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은 활발한 매스ㆍ컴뮤니케이슌을 가져오게 한 것이야말로 프로테스탄트에 힘입은 바가 절대하였다.

여기서 또 하나의 커다란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은 프로테스탄트가 한글 성경을 비롯한 각종 한글로 된 서적을 냄으로서 한국의 개화를 가져온 근대화운동을 적극 촉진한 것과 프로테스탄트 자체의 대폭진출을 마련한 일이다. 한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점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프로테스탄트가 대량 진출에 성공한 것은 이 문서를 통한 전도사업에 그 원인을 두고 있음을 알 수가 있겠다. 연대적으로 카돌릭은 훨씬 앞서서 한국에 들어왔건만 뒤져 들어온 프로테스탄트보다 그 교세 확장에 있어서 한 걸음 뒤떨어져 있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나 여기서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문서 운동의 활발하고 못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한국에 있어서의 성공은 활발한 문서운동 특히 한글을 토대로한 문서운동에 커다란 원인이 있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

 
   1. 한국말 성경의 출현의 뜻

   2. 성경을 앞잡이로 한 기독교의 전래

  3. 문서운동에 성공한 프로테스탄트

   4. 프로테스탄트와 신문

   5. 민주주의 사상을 펴다

   6. 자주 독립 사상의 앙양

   7. 매스 메디아로서의 공헌과 그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