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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  희랍과 히브리 보배들

성경을 열심히 사랑하는이에게서 온 편지를 성서공회에서 받았는데 그 사연에 이르기를
"나는 성경 번역하는 일을 돕고저 합니다. 그러니 박사께서 이 원시 방언들 중에 한 방언의 사전과 문법을 보내 주시면 나는 틈나는 시간을 신약 번역하는 일에 바치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기를 원하는 마음은 훌륭한 마음이다. 그러나 아무 번역자도 복잡하게 만들어낸 문법 법칙과 보통사전에서 찾아내는 말을 맞추어 놓음으로, 좋은 번역을 내놓을 수는 없다. 진정한 성경 번역자는 그 풍부한 문화적색채(色彩)를 가진 한 방언에 대한 부지런한 학도(學徒)가 되는 동시에 성경이 근본 씌어진 방언들의 역사적 배경을 알려고 철저히 그 방언들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에 대한 겉껍데기 지식만 가지고는 좋은 번역자가 될 수 없다. 철저한 훈련이 없어 가지고는 성경의 글자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인(基因)한 자기의 무식을 폭로하는것 밖에 아니된다는 것을 번역자는 발견하게 될찌 모른다. 『주의 이름을 헛되히 부르는 것』은 보통 허텅거리로 가리킴인 것인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의미로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구약의 뜻은 맹세할 때에 주의 이름을 말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 맹세한 것을 깨뜨려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맹세를 깨뜨리는 일』은 저주(詛呪)하는 일은 아니나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 지키는 일을 저버리는 일이다. 예수 때에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버릇이 어떻게도 아무 뜻없이 또 생각없이 널리 유행하였던지 예수께서 경고하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허턱 부름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이 되니까 애당초에 그런 헛된 일을 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성경의 어떤 표현법(表現法)은 매우 분명하여 그 뜻을 알려고 조사연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나안인 시몬』(마태 10:4)이라는 구절를 읽을 때에 가나안은 시몬이 온 지방을 가리키는 것인줄로 의례히 생각한다. 그러나 희랍어 성경을 자세히 조사하면 이것은 지방 이름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이 글자는 극렬(極烈)한 민족주의당(民族主義當)에 속한 사람이라는 아람말의 직역이다. 그런 사람을 열심당이라고 한다. 이런 줄을 알면 사도 1:13에서 그 같은 사람을 『셀롯(열심당)인 시몬』이라고 부른 것을 어찌하여 그렇게 불렀는지 얼른 알게 된다. 사도행전에는 그 아람말이 희랍말로 번역되어 있고 마태복음에는 그 아람말을 그대로 빌어다가 희랍어로 써놓은 것이다. 로마를 배척하는 정치가 중에 하나로 알려진 시몬과 같은 사람은 예수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부담이 될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면에 예수께서는 로마를 위하여 자기 민족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계약을 맺어 자기 국민에게 반역자 취급을 당하는 세리 레위 같은 사람도 제자로 택하셨다. 예수의 몇 아니되는 제자들 중에 이런 정치적 감정과 행동의 두 극단(極端)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두 사람들은 예수의 정치적 위신을 높이지는 못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의 권세에 붙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전하시는 것이 그 목적임을 보이신 것이다.

대중에 향하여 정치적 웅변을 토하는 것의 옳음을 성경으로 증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태 10:27)고 가르쳐 주지 않으셨는가? 이 말씀은 아래 거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르짖으라는 것이 아닌가? 』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일찌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은 그 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뜻하신 것은 자기 제자들더러 비밀한 중에 자기에게서 들은 말을 저녁 서늘한 때에 이웃 사람들이 편평한 지붕에 쉬러 모여 앉아 말들을 주고 받을 때에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 들려 주라는 분부시다. 예수께서는 정치적집회를 생각하신 것은 아니요, 이웃들이 모여 친밀한 회화를 하는 것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 회화 중에서 자기 생활에 밀접한 부분이 되어버린 믿음과 또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들과 나누려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 것이다.
성경의 잘못된 해석은 말의 뜻이 변하는데서 오기도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5에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한 말씀에서 영어로 『앞서지』는 "prevent" 방해한다)로 되어 있는데 그 말은 래틴말에서 왔고 그 뜻은 『먼저 가라』이다. 우리 한국어 번역은 분명하다.

영어 쩨임스왕 번역 성경에 어떤 잘못된 번역은 원어에 대한 불충분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들이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쩨임스왕 시대의 학자들은 그 시대에 있던 성경지식에 뒤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쩨임스왕 시대 이후 현대까지 우리는 성경 원어의 뜻과 어떤 문법학적 형태(形態)에 대하여 더 분명히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밖에 없다. 요한 20:17의 쩨임스왕 번역은 『나를 만지지 말라』(우리 말 번역도 마찬가지다)하였는데 더 합당한 번역은 『나를 붙잡지 말라』다. 전에는 희랍어동사의 여러 다른 어시형(語時形)은 시간만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지금은 어시형은 행동의 서로 다른 방면 혹은 여러 가지 다른 행동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요한 20:17에서 희랍어는 현재 어시로 되어 있는데 누가 하고 있던 일을 고만 두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동사가 다른 종류의 문법형인 부정과거(否定過去. 애오리스트)이었더면 미래에 무엇을 하지 아니하리라는 뜻 곧 현재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된다. 이런 미묘한 구별이 있는 것을 모르고 쩨임쓰왕의 번역자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으나 그들의 번역은 이상한 점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아직 가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자기를 만지지 말라는 의외의 번역을 하게 되었다. 마태 28:9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여인들을 만나셨을 때에 자기 발을 그들이 만지게 내버려 두셨다고 하였다.

성경원어에 있는 많은 세미(細微)한 구별을 언제든지 다 그대로 번역하기는 힘든다. 그러나 할수 있는한 정당하게 다루어야 할것이다. 마태六장에서 『염려한다. 걱정한다』라는 동사에 두가지 형(形)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마태 6:25에 있는 동사형의 의미는 『계속하여 염려하지 말라』다. 이것도 이 위에서 말한 요한 20:17에서 나온 동사형과 같은 동사형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위하여 그 일용할 것을 넉넉히 공급(供給)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신 후에 그 말씀을 동사의 다른 형(形)으로 마치셨다. 마태 6:34의 동사의 뜻은 『자, 이 모든 것들 때문에 이 후로는 염려하지 말라』다. 주께서는 자기 제자들더러 염려하는 일을 고만 두라는 권면으로 그 교훈을 시작하시고 그 제자들은 이 교훈을 듣고 염려를 고만 둔줄로 아시면서 이 후로는 또 염려하는 일이 다시 없게 하라고 경계하셨다. 번역할 때에 이런 뜻을 다 옮기기란 좀 거치장스러워 원문을 긴 말로 부연(敷衍)하는데 빠지기 쉽다. 그러나 어떤 방언으로는 희랍어의 이런 세미한 구별을 완전히 옮길 수도 있다.

쩨임쓰왕 번역 성경을 보면 원어에는 분간하지 아니한 것을 분간하여 놓은것 같은 구절이 몇 있다. 마가 1:4에서 『죄 사함』이라는 말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죄 사함』이란 말은 『용서』라는 말과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신학상 용어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희랍어에는 여기 『죄 사함』이라고 번역된 말은 보통 말하는 『용서한다』와 같은 말이다. 그래서 현대에 번역된 성경에는 우리가 더 알기 쉽고 뜻이 많은 『용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현대번역을 더 자세히 연구하고 학자적 주석책들을 더 주의깊게 읽으므로 성경 번역자들은 예전에 번역된 성경에 기초한 제한된 지식 때문에 일어나게 될 많은 실수를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원어에 대하여 충분치는 못한 지식이라도 그 지식이 있으면 큰 도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신용할 수 없는 어원학(語源學)이나 언어연상학(言語聯想學)에 기초한 겉껍데기 지식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어떤이들이 희랍어 『카타볼레』는 『창세(創世)』(요한 17:24, 에베소 1:4)라는 뜻이 아닐듯 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말에서 『카타』는 『내리친다』는 뜻이 있고 『볼레』는 『내 던진다』는 뜻이 있으니 (카타볼레)는 『파괴』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요한 14:24에 『창세(創世)』라 번역한 것을 『세상의 파괴』라고 번역하여야 할것이라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아담 전 시대에 대하여 이상 야릇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희랍어의 입장에서 보면 『파괴』라는 뜻은 전연 없다. 어느 말의 뜻을 알기 위하여 그 글자를 갈기 갈기 찢어가지고 이야기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말의 참뜻을 잃고 얼토당토 않은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자칭 희랍어학자라는 이들이 이런 글자 찢는 일을 곧잘한다. 그러나 어떤 외국인이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유사점(類似點)을 가지고 그 말의 뜻을 정할 수 없고 그 말을 사용하는 본토인들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 보아 정할 것이다. 요한 3:16에서 어느 성경이든지 『한 시대를 위한 생명』이라고 아니하고 『영생』이라고 번역하였다. 성경연구자는 원어의 뜻을 자기 뜻대로 만들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씌어지는 법과 성경시대에 있었던 성경 아닌 문서에서 씌어지는 법을 보고 그 뜻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만 희랍어 『카리스』는 『아름다움』『은혜』『은사』『감사』의 뜻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학자도 여러 말에 같은 어근(語根) "nbl"이 있으면 『움치러지다』『낭비하다』『부스러지다』『미련하다』『거룩지 못하다』『짐승의 시체』『송장』『우상』의 뜻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암시하는것 같은 말이라도 역사적으로는 적당치 못한 어원(語源)이 많이 있어 거기 유혹(誘惑)을 받기 쉽다. 이런 경우가 희랍어 『엑클레시아(교회)』를 해석할 때 나타난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소리 내어 부른다』라는 뜻이 있는 두 어근(語根)에서 온 말인 것은 참되다. 많은 목사들은 이 어근의 뜻을 이용하여 많은 도움이 있는 영적 뜻을 발견하여 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이 말이 이렇게 씌어진 일은 없다. 이 말은 단순히 『회합(會合)』혹 『회중(會衆)』을 의미할 뿐이다. 희랍 도시국가에서는 회합을 하려면 사람들을 그 도시와 그 밭에서 불러왔다. 그 말의 어원은 그대로 있으나 그 참된 뜻은 『회합』이요, 또 신약시대 사람들도 그 어원대로 알지 아니하고 그저 그 보통 씌어지는 뜻대로 알고 썼다.

우리는 말을 오해할 위험이 있다고 하여 성경을 더 원만히 이해하기 위하여 정밀히 말을 조사하려는 열심을 버려서는 아니 될것이다. 그 반대로 번역자의 사업은 원어(原語)를 정당하게 조사연구함으로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얻게 된다. 사실상 번역자는 원어를 계속적으로 연구하여야 할것이니 번역자가 희랍어와 히브리어에서 멀리 할수록 근본 뜻에서 더 멀어지고 하나님의 묵시의 풍성함을 잃게 되는 까닭이다.

희랍어와 히브리어의 몇자를 들어 원어 연구를 하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보배가 있다는 것을 뵈려 한다.

두 희랍어가 있는데 번역하기를 『언약(covenant)』『계약(contract)』『맹약(agreement)』라 하였다. 이 두 자는 『디 아데케』와 『신데케』다. 그러나 신약에는 『디 아데케』만 있다. 그러면 왜 신약기자들은 『디 아데케』만 사용하였는가? 우리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어떤 분간이 있어서 그리 하였을까? 그런 분간이 있다. 이 두 말은 『언약』『계약』의 뜻이 있으나 『디 아데케』를 사용함으로 한 사람만이 계약을 시작하고 조건을 정한다는 뜻을 나타내게 된다. 이런 이유로 『유서』혹은 『서약』의 의미로 『디 아데케』를 사용하였으니 자기 재산을 물려줄 이는 그 언약을 먼저 결정지을 이요, 또 그는 조건과 보상(報賞)을 만들어 놓을 이인 까닭이다. 『신데케』를 꾸미는데는 변론과 양보와 타협과 두 쪽이 다 좋은 흥정을 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디아데케』에는 그렇지 않고 그 언약의 한쪽만이 그 조건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분간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가장 오묘한 진리가 잘 드러나게 되었다. 하나님과는 아무도 흥정할 수 없다. 그는 무엇이나 사람에게 제일 좋을것만 정하여 놓으시는 까닭이다. 기독교 아닌 종교에서는 사람을 장부를 잘 닦아 두는 신과 흥정하는 영리한 장사군으로 여긴다. 사람은 값싼 흥정으로 초자연적 이익을 얻으려고 신을 그 영리한 꾀로 까딱수에 넘어가게 만드는 동물로 생각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이런 에누리 흥정하는 것이 없다. 그는 언약을 세우신 한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사자들(嗣子)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들된 권리를 버리고 유산을 허랑방탕하여 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경륜은 그 값이 떨어지거나 하나님의 권위가 사람들의 영리한 꾀로 인하여 빼앗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이루어지고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확실히 된 은혜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그의 아들의 죽음은 새 언약의 피다.(디 아데케 -고린도전서 11:26).

희랍어에 가장 유명한 두 글자는『아가파오』와 『필레오』다. 이 두 말을 『사랑』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두 말은 인간의 감정중에 가장 힘센 감정의 서로 다른 두 방면을 나타낸다. 『아가파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고 『필레오』는 『사람의 사랑』만을 가리킨다고 말하여 왔다. 그러나 이 구별은 그 다른 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 나타내는 것이 되므로 정당치 못하다고 보겠다. 이 두 말은 다 열렬한 감정을 보이는 것이거나 비교적 약한 감정을 보이는 것이거나 할것이다. 이 두 말은 사랑의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그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가파오』는 우리 사랑의 대상(對象)에 대하여 그 진가(眞價)를 강렬히 깨닫는데서 일어나는 사랑이요, 『필레오』는 친밀하고 오랫동안 사귀는 결과로 오는 감정적 애착(愛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까닭에 성경에서는 『필레오』인 사랑을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데가 없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라고 명한데도 『아가파오』를 사용하였다. 친밀한 사귐에서만 오는것 같은 사랑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함으로 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더러 남에게 있는 가치를 깊이 알아주라고 권고한 것이기 때문에 『아가파오』라야 이 모든 뜻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서로 감정적 결합(필레오)을 꼭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주 친밀한 친구들이란 우리 생활 관계의 성질로 말미암아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적 결합이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가치를 알아줄 수는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실』(요한 3:16)때에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류와 감정적 결합을 하셨다는 것은 아니요, 사람들을 은혜의 눈으로 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로 하여 사람들의 가치를 보셨다. 그들이 죄를 지어 반역행동을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로 하여 그들의 가치를 알아주셨다. 이것이 『아가파오』의 구속적 사랑이다.

어떤 어려운 구절의 뜻은 희랍말 하나의 뜻에 달려 있다. 우리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누가 6:43)를 읽을 때에 처음에는 좀 곤난을 느끼게 된다. 어떤 늙고 썩은 봉숭아 나무라도 맛좋은 복숭아를 그대로 맺치고 있고 어떤 보기 좋은 나무라도 아주 흉한 열매를 맺쳐 그 중 더러는 나무에 달려 있으면서도 썩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이 말 『못된』『썩은』의 희랍어는 『싸푸라스』인데 그 뜻은 무엇인가? 그 해석의 단서(端緖) 한가지는 큰 그물에 잡은 고기의 비유(마태 13:47~)에 이같은 말이 사용된데서 찾을 수 있다.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고기는 (희랍어 형용사 『싸푸라스』를 사용하였다.) 내어 버렸다. 이 그물에 썩은 고기가 걸린 것이 아니라 식용(食用)이 될 수 없는 고기가 걸린 것이다. 이 『싸푸라스』라는 말은 식용이 될 수 없는 것의 여러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제 이 말을 나무 열매에 적용시키면 아무리 보기에 좋은 나무라도 식용이 될 수 없는 열매를 맺치는 수가 있다. 이것은 나무의 성질에 달린 것이므로 그 나무가 하고 싶어도 좋은 열매는 맺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식용이 될 수 있는 열매를 자연적으로 맺치는 나무는 쓰고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칠 수 없는 것이다. 이 『싸푸라스』라는 말을 정당하게 이해할 때에 이 비유의 뜻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사람은 그 근본 성질에 따라 열매를 맺치는 것이다.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기본 성격이 중요한 것이다. 성신의 열매를 맺치려 하면 우리가 성신에게 접 붙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새 성질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진리를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대로 하면 새로 나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나 희랍어의 참된 지식이 없이 성경의 말을 읽다가는 잘못된 인상을 얻기가 쉽다. 그러므로 번역자는 이 지식을 가지고 정당한 번역을 하도록 노력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히브리어근(語根) qdsh와 히랍어근 hag-는 『착하다』라는 말의 동의어(同義語)만은 아니다. 그 근본 뜻에는 『구별하다. 성별(聖別)하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바치다』가 있다. 인본주의(人本主義)적 사회에서 기독교의 윤리적 가치를 강조함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우리들은 모든 성경에 가장 중요한 말들 가운데 하나가 근본적으로 윤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고 얼마만큼 놀라게 된다. 그 말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바친다』는 말이다. 이 말에 있는 것과 같은 히브리어근을 『창녀』와 『소돔사람(남색자)』이라는 말에도 사용하였다. 이 인간들은 셈족 종교에서 어떤 인간들이었던가? 그들은 그 이방 신의 관능(官能)적 예배에 바친 인간들이다. 동양 어떤 곳에서는 아직도 행하고 있는 풍습인데 동녀 동남을 신전에 바쳐 성적 관계를 행하게 하는 것은 오랜 이야기다.

그러면 히브리어나 희랍어가 높은 도덕적 내용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격과 그를 예배하는 사람들의 사는 생활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엄위하시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와 『농이나 할 친구』가 아니다. 그의 거룩하심, 그의 엄위하심으로 말미암아 몸을 바친다는 우리의 생각이 높고 깨끗하게 된다. 우리가 성결하여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결을 닮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참된 성결은 있을 수 없게 되고, 그런 성결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경건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말의 뜻에 대하여 너머 제한된 생각을 가지게 되므로 구약을 오해하기 쉽다. 히브리말 『네페쉬(nephesh)』를 흔히 『영혼』이라고 번역하는데 실로 많은 뜻을 가졌으니 『숨』『생명』『마음』『산 물건』『짐승』『사람』『자기』들의 뜻이 있다. 에스겔 18:4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한 말씀에서 영혼 그 자체가 파멸(破滅)을 의미하는 듯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전체 상하문(上下文)을 읽고 또 이 말 『네페쉬』의 뜻을 바로 잡을 때에 그런 해석의 부당함을 알게 된다. 에스겔이 말하려고 한 것은 『죄를 지은 사람 그 사람만이 그 죄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다』하는 것이다.

말 수(數)와 그 해석이 철저한 자전이라도 무엇이든지 말끔 설명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의 하나는 히브리말 『헤세드(hesed)』다. 이 글자를 『자비』『긍휼』『인자』『사랑』『인애』『선대』『불쌍히 여김』『굳은 사랑』『은혜』로 번역하는데 이 셈족어의 풍부한 속 뜻을 겨우 몇가지만 보인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이 말은 자기 백성을 위한 왕의 굳은 사랑과 그 왕을 위한 백성의 열렬한 정성을 가리킨다. 그 백성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그 하나님을 위한 백성의 충성을 가리킨다. 어떤 번역자는 『언약의 사랑』이라 하였는데 너머 제한된듯 하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매는 충만한 정서(情緖)니 자비와 인애와 경건의 끊임 없는 동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히 이 말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여도 흡족치 못하다. 우리는 율법과 예언을 읽고 또 읽음으로서만 이 말의 깊고 묘한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하는 일을 성의껏 하려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啓示)를 알려고 역사적 배경을 검토하면서 성경의 전후 문맥을 할 수 있는대로 충분히 연구하는 번역자는 위대한 신학적 의의가 있는 구절들의 풍부한 의미만 발견할뿐 아니라 아무 주의 없이 흘려버리던 변변치 못한 말과 구절에서 성경의 정확성(正確性)을 증명할 커다란 증거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저물어 해질 때에』(원문대로 하면 『저녁이 오고 해가 질 때에』다.)(마가 1:32)를 읽고 공연한 말의 되풀이를 하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저물어』한마디로 족할터인데 왜 『해 질 때에』를 또 썼을까? 그러나 이렇게 되풀이하고 강조한 말 속에서 그 날에 무슨 일이 생겼었던지 분명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 가르치러 들어가셨다. 귀신들린 사람이 들어와 있다가 나사렛 예수가 누군지를 소리쳐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니 그 사람은 나음을 입었다. 사람들은 놀랬다. 회당에서 예배후 예수께서는 제자중 몇을 데리시고 베드로의 집에 가셨다. 그러나 해가 지고 안식일이 지나게 되기까지는 유대 율법을 양심적으로 지키는 이 사람들은 주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데려』오게 하지는 못하였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셨다는 사실 때문에 병 낫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안식일 지키는 법을 깨뜨려야할 이유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저녁이 오기만 고대하고 있는 이 사람들을 분명히 볼 수 있다. 해가 지자마자  병자와 귀신들린 친척이나 친구를 예수께로 급하게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마태 5:15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하셨는데 이를 읽고 예수께서 너머 심하게 과장(誇張)하여 말씀하셨다고 말할찌 모른다. 상고 유대인 가정에서 사용하던 작고 약한 등잔을 알면 예수께서 『집안 모든 사람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은 좀 이상하다고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 형편을 생각한다 하면 예수의 말씀에는 아무 과장함이 없다. 그때 예수께서는 거의 한간방 집에 사는 보통 민중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등잔 두 셋씩 켜고 사는 사치를 하여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듣는 사람들의 사는 생활 그것을 반영하는 말을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바다에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잡게 하신 고기 수효는 一백 쉰 셋이었다(요한 21:4~14). 이 기사는 믿을 수 없을만큼 우스운 것이다. 우리는 이 제자가 이렇게 자세한 숫자를 기록하는데 무슨 흥미를 느꼈을까 하고 의심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상고시대 그 지역에서는 一五三 수는 땅위에 있는 모든 족속과 국민의 전체 수효를 뵈는 것이라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그 기사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이것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시는 주님의 크신 명령과 합하는 수효다.

어떤 말들은 한 방언에서는 이런 뜻을 가지나 다른 방언에서는 그 같은 뜻을 가지게 되지 아니한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자기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또 십자가 위에서도 그렇게 부르신 것은 우리로는 매우 이상하게 보여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는 그 성격이 매우 엄중하시다는 것을 보이고 자기에게 그렇게 정성을 바치는 그 어머니를 책망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하면 그것은 신약시대의 희랍어에서는 『끼나이(여인)』라는 말을 경의와 애정을 표할 때에 늘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까닭이다. 사실로 예수께서 더 의례적(儀禮的)인 『어머니』라는 말을 쓰신 것보다 『여인』이라는 말을 쓰심으로 그 애정을 더 잘 나타내신 것이다. 이것은 의심스러워 보일찌 모르나 우리는 남의 방언을 우리의 방언으로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여서는 아니된다.

숨은 진리를 나타내는데 말과 역사적 배경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법적 형태도 다르게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알게 하여 준다. 고전 희랍어의 전통에 통달한 상고 철학자와 비밀종교의 제사장에게는 『주의 기도문』의 문법적 형태가 보잘것 없이 보일는지 모른다. 지상이나 천상의 주권자에게 간원을 할 때에 사용하는 전아(典雅)한 문체를 주기도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엄위한 형식적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얼른 보기에 무뚝뚝한 명령사를 써서 그 하나님께 구하였다. 구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께 불손(不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 하늘 아버지를 새롭게 안 사실에 일치하도록 말한 것뿐이다. 상고 희랍 세계의 쓰레기더미 가운데서 찾아낸 수천 수만의 글쓴 종이쪽을 보면 그 때는 가족들 사이에서 명령어형을 사용한 것을 볼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말할 때에 자기들이 그 세상 아버지에게 말할 때처럼 친근한 말로 하였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말은 이것과 정반대가 되었다. 그전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할 때에 매우 형식적이었었다. 우리는 뜻 없는 말을 씀으로 예절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점점 그런 형식을 버리고 우리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한다. 산 사람에게 산 말로 복음을 전하면 신앙은 성신의 힘으로 살게 된다.

성경번역자는 자기가 번역하는 성경은 산산 조각난 책이 아니요,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진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번역자는 신약과 구약을 따로 떨어진 묵시의 부분으로 생각하고 번역을 시작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아니되어 자기 생각을 고쳐야 할것을 알게 된다. 신약에는 네 짧은 책들(빌레몬, 요한一, 二, 三서)에만 구약에서 인용한 구절이 없을 뿐이다. 요한계시록에는 구약에서 인용한 구절이 四백五十번 이상이나 되고, 마태, 사도, 누가, 히브리에는 백번 이상이나 된다. 신약에서 가장 자조 인용한 구약책들은 시편(186번), 이사야(177번), 출애굽기(91번), 창세기(79번), 에스겔(63번), 예레미야(55번)다. 신약에서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아니한 구약책은 넷인데 룻, 에스라, 전도, 솔로몬의 아가다. 성경의 통일성을 뵈는 것은 인용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六十六권을 한 묵시로 연합시키는 큰 제목들에도 있다. 『언약』『은혜』『희생』『사랑』『자비』『속죄』『희락』『화평』『구원』『거룩』『심판』과 같은 말들은 성경을 깨뜨리지 못할 한 완전한 통일체(統一體)로 만든다. 번역자는 신약에서 번역하는 말들을 구약에서는 어떻게 번역할찌 생각하지 않고는 옳은 번역을 하지 못할 것이다.

번역하는 일이 매우 쉽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여러가지 곤난점 때문에 부질없이 공포를 느낄 것도 아니다. 성경번역은 몇 주일이나 몇 달에 마칠 일은 아니다. 이것은 여러 해 혹은 일생의 일이다. 그런데 번역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읽는 일에 훈련이 부족한 사람은 번역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 두가지를 지내치고 마는 수가 있다. 그 곤난점의 하나는 바울이 사용한 그 긴 구절을 어떻게 하랴 하는 것이다. 보통 사용하는 영어는 아니지만 많은 부속구(附屬句)가 있는 길고 복잡한 글귀를 영어로는 만들수 있다. 그러나 구라파어 계통의 말과 전수히 다른 말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쓴 글의 특색인 복잡한 글귀의 구조를 뜯어고치고 가지고 번역해야 될 것을 알게 된다. 많은 교회의 창립자요, 이방인의 사도인 이 위대한 선교사는 글을 쓸 때에 그 마음이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제목으로 너무나 가득 차 있어서 어디 가서 글을 끊어야 좋을찌를 몰라서 한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될찌 모르나 다른 희랍 저술가들과 비교하여 보면 바울의 글은 그리 이상하게 긴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떻든 기독교의 기초되는 진리들의 서로 뜻 깊은 관계를 살리면서 기묘하게 서로 연락되는 위치를 가지고 구절들이 하나 하나 연이어진 바울의 글을 뜯어놓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성경 번역자와 주석가에게 또 한가지 곤난한 문제는 동사어시(動詞語時)의 히브리 사용법이다. 히브리 동사형은 서로 다른 어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기도 하니 그것은 근본적으로 행동의 시간을 표시하기보다는 행동의 종류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히브리 동사어시에는 불완전어시와 완전어시 둘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두 어시는 대체로 불완전한 행동을 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완전어시는 우리의 현재어시와 미래어시와 같다고 보고 불완전어시는 우리의 과거어시와 같다고 보나 많은 예외가 있다. 그리고 첫째 구절에 완전동사가 있고 그 뒤에 오는 구절들에는 히브리 관사(冠詞) 『오』가 있으면 불완전동사도 첫째 구절에 있는 완전동사와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같은 모양으로 처음 나오는 완전동사가 『오』로 소개된 불완전동사로 계속되기도 한다. 예언자가 미래를 말할 때에 항상 완전동사를 사용하였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이미 이루어진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문장분석(文章分析)은 더 복잡하게 된다. 성경해석자는 흔히 혼란에 빠지게 되나니 그것은 그 예언자가 언제 예언을 하고 언제 자기 백성의 역사를 말하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대개는 상하문맥(上下文脈)이 그 구절의 뜻을 분명케 하여 주기는 하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로 의심을 하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드나니 그것은 충분한 확증을 가지고 역사적배경을 만들어 놓을 수가 없게 되는 까닭이다.

성경의 보통독자들은 옛날부터 잘 알아 오던 구절들이 매우 다르게 번역되도록 되는 서로 다른 원고가 많다는데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 우리의 첫 느낌은 무엇을 잃은듯 하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번역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번역문은 우리에게 전하여 내려온 종교적 경험의 한 부분을 이루었는데 만일 그것을 변한다고 하면 그 성경절이 가지고 있는 뜻과 영적내용을 깨뜨리게 되는듯이 느끼게 된다. 로마八장二十八절을 1946년에 새로 번역된 영어 신약대로 읽으면 이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선을 이루신다』 그러나 구역에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유익하게 되느니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구역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새 친구보다 옛 친구를 만나 더 친근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도 예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심정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묵은 것이 좋다』하고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비유로 드러내셨다(누가 5:39). 그러나 우리는 새 번역이라도 조사하여 봄이 없이 덮어놓고 나쁘다고는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영적 진리를 놓칠찌도 모른다. 우리는 사물을 전에 알던 법대로만 알려다가 더 풍부한 지식을 내버리게 될찌도 모른다. 현대역은 더 학자적이요 과학적이니, 이것을 채택하여야 된다고 변론함으로만 충분하지 않다. 종교란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독교경험의 빛으로 그 가치를 시험하여 보기 전까지는 새로운 번역을 그렇게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시 로마八장二十八절에 대한 신·구역을 비교하여 볼것이다. 구역은 『모든 일이 합동하여 유익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고 신역은 모든 것을 우리의 선이 되도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 하였다. 구역에는 맹목적 운명론적 사상이 있고 신역에는 인격적 하나님이 우리 기독교 생활과 경험의 기초가 된다는 사상이 있다. 하나는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모험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해석이요, 다른 것은 잠잠한 중에 얻는 확신의 기초를 주는 해석이다.

요한一서五장十八절을 보통 번역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자기를 지키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한다. 1946년 새로 번역된 영어 성경에는 이 절을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나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그(예수)가 그(사람)을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로 번역하였다. 이 두 번역의 다름은 크다. 그러나 희랍어에는 그 차이가 『그 자신을』과 『그를』뿐이다. 구역은 우리 경험과 또는 다른 성경 말씀과 모순되는 진리를 말하였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우리를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신역의 옮음을 곧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못 지키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예수께서는 우리를 지키실 수 있다. 그의 신으로 구속받은 사람들을 지켜 주신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가져오는데서
멈추고 마는 것이 아니고 성결의 기초를 만들어 주기도 하신다.

쩨임스왕 번역 영어 성경에는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절들이 있다. 그 이유는 十七세기에 사용할 수 있었던 희랍어 본문은 매우 결점이 많았던 것이다. 고린도전 八장七절에 『우상의 양심(우리 말로는 『우상 섬기던 것이 버릇이 되어』로 되어 있다)』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성경은 우상이 양심을 가졌다고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전체 성경의 교훈과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상의 의식』도 아니다. 어떤 사본에는 두 희랍말이 서로 혼동되어 있다. 하나는 양심이란 뜻이요, 하나는 경험이란 뜻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알게 되면 원문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고 따라서 『우상 섬기던 것이 버릇이 되어』하고 번역한 우리 말 성경이 얼마나 낫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번역상 차이가 더 좋은 사본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얼른 말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그 원고가 처음 생기던 시기에 더 가까운 사본은 더 정확한 문장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원 저자의 뜻을 더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로마一장十七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을 예로 보자. 이 말씀은 믿음의 필요를 강조한 말씀으로 하여 몇세기를 사용되어 왔고 또 일생을 통하여 믿음을 계속하여 지킬 필요를 역설하는 설교 본문으로 하여 몇세기를 사용되어 왔다. 이 구절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을는지 모르나 이 구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은 살리라』라 하는 뜻이 더 합당할찌 모른다. 실상 이 뜻은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로마 5:1)라는 큰 제목을 설명하기 위하여 쓴 로마인서의 사상과 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인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하는 사상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라는 사상 이 두 사상을 취급한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한 근본적인 기독교진리를 취급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오는 의로움이다. 이 의로움은 일종의 떠맡긴 의로움이니 그 근본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고 그 감응(感應)은 사람의 믿음 안에 있다. 이렇게 번역함은 바울 사상과 일치할뿐 아니라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온 하박국 二장四절의 히브리어에도 더 참되다.

보통 사람들과 어떤 신학도들은 희랍어를 『불가능한 방언』으로 여기고 히브리어를 『딴 세상 말』로 여긴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번역을 더 잘 되게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 두 방언은 일상 필수품(必須品)과 같이 자기가 하는 번역의 가치와 효과를 강하게 하여주고 또 자기에게 가장 고귀한 영적 경험을 갖다 주는 기회를 제공(提供)하는 방언들이다.